그것은 쾌락도, 기쁨도 없는 교합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
링크는 연결되었고,
마음은 영원히 단절되어, 절대 다시 연결되지 못하리라는 것도
어찌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어이없는 아이러니.
-린,
-듣고 싶지 않아, 아쳐.
-린, 나는-
-듣고 싶지 않아!
린이, 화를 낸다. 아아, 그래. 화낼 만도 하지. 어젯밤 그 꼴을 그대로 린에게 보였으니. 변명이라도 할까 했지만 퇴로는 막힌다. 내가 미움받는 거야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익숙해져서 괜찮지만-
걱정스러운건, 린의 감정이 멋대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래, 그 엉망인 꼴로 도대체 누구와 뒹굴다 온 거야, 아쳐?
할 말이 없다. 본 건가. 그저, 추태만 보였을 줄 알았는데… 정말로, 나란 녀석은.
-누구야?
-….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 누구라고 이야기할까.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는데. 지금의 나는.
-길가메쉬지?
-…!
숨이 막힌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이, 심장을 그대로 쥐어뜯어 터뜨릴 것 같은 고통이 뒤따른다. 어째서, 네가, 그 이름을 말하지? 나는-
-당신의 소원은 이룰 수 없어.
소원.
그녀는, 나에게, 나의 ‘소원(所願)’을 말한다.
그것은, 결코 나의 소원이 아닐진대. 아니, 소원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 차라리, 그것은-
- 그는 절대로, 당신을 돌아보지 않을 테니까.
-… 괜찮다, 마스터. 내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욕심내는 그런 바보로 보이는 건가?
그래, 욕심. 욕심이다.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다. 가질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그의 이름과, 그의 모습일까. 이 눈 속에 담아둔 것이 기록으로만 본체에 저장된다고 해도, 그 기록만으로도 부서진 마음을 추스릴 수 있게- 끝없이 그를 갈망한다. 이것이 욕심이 아니면 무엇인가.
-단순히, 빛에 닿아보고 싶었을 뿐. 폐를 끼쳤군. 다음부턴 조심하지. 그나저나, 늦었다. 얼른 에미야 저로 가지 않으면 세이버가 아침을 몽땅 먹어 버릴거다.
-잘 빠져나가네, 당신.
-…익숙하니까.
그래.
혼자인 것도.
미움받는 것도.
상처받는 것도.
…
절망도.
-그래, 그럼 다녀 올게.
-아아, 마스터.
‘린’ 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아아… 꼴사납군.”
침대 안에서, 아쳐는 쿡쿡 웃었다. 린을 깨워 학교로 보내기 직전 했던 말다툼이 생각난다. 거의 이를 악물고 린을 보냈지만, 그 이후로는 몸이 버텨주지 못해 결국 침대행. 어젯밤 비를 맞은 그대로 드러누운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어, 빗물에 찌들고 정액이 묻은 이불은 차마 덮기가 찜찜할 정도라, 시트도 갈지 않은 채 그냥 새 이불을 꺼내 덮었다. 시트를 갈기엔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몸이 피곤하다고 비명을 지른다. 그래, 아프지.
어디가?
한참 그러고 나서 몸을 일으키니, 허리부터 온몸으로 뻗어나가는 둔통이란. 그대로 다시 드러누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아직 8시 30분. 조금 더 누워있을 수 있다. 그래, 조금만 누워서 쉬자. 몸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그래, 그 엉망인 꼴로 도대체 누구와 뒹굴다 온 거야, 아쳐?
…이제는 정말로,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잠시만, 현실에서 도망가자. 그리고 나면, 또다시 현실과 대치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자신의 업보. 스스로의 일로 남에게 피해주는 짓은 죽어도 하지 않을 테니.
아쳐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눈을 뜨세요.
눈이 떠진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의 생각이기도 한 냥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은 황량한 검의 대지- 서번트는 꿈을 꾸지 않는다. 단지, 기억을 볼 뿐. 이것은, 자신의 심상세계. 아무것도 없이, 단지 수많은 비석처럼 검들이 꽂혀 있는- 고독의 장소.
스스로를 이 곳에 가두며, 자신의 죄를 참한다. 부서져서 칼끝과 함께 대지에 박힌 마음을 자신의 참회로써 낫게 하기 위해.
이곳은 어차피,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곳은, 스스로를 ‘부수고자’ 하는 장소.
그렇기에 이 곳에 결코, 그의 쉼터는 ‘없다’.
-당신에게 세계의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세계-
몸이 움찔 떨린다. 또다시, 살해의 기록이 머릿속에 저장될까. 두려움은 신경을 마비시킨다.
-‘길가메쉬’의 정을 당신은 받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 정을 핵으로 삼아, 마력을 모아 주십시오.
들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 이해가 되고 있는데 이해하기를 거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마력을 축으로 삼아, 새로운 가공의 ‘영웅’ 을 만들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는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검의 대지가 무너진다. 세계가 암전한다. 그리고-
“헉…,”
눈을, 떴다.
오한이 멈추질 않는다. 무언가, 어이없을만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세계의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언령(言令).
배를 조심스레 만져본다. 태(胎)로서, 자신을 사용하겠다던 세계와, 뱃속에서 꿈틀대는 낯선 마력과, 그리고-
황금의 왕.
셋의 이미지가 섞인다. 아쳐는 어지럽게 흩어지는 자신의 기력을 모았다. 괜찮다. 괜찮아. 영웅왕은 이 사실을 모를 것이다. 아니,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자신밖에 없겠지. 무너지려는 몸을 간신히 받쳐 일으키고서는, 다시 ‘보통의 아쳐’ 로 돌아가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직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아직은, 견딜 수 있다.
수천 수억의 살인 가운데에서 마모되던 심장도, 아직은 뛰고 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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