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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궁]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거리

보랏빛구름 2009. 3. 16. 11:57

매우 미미한 차이였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장바구니는 늘 무겁다. 그 집에서 사는 식구가 제법 많기 때문이리라. 원 주인이었던 에미야 시로와 그의 서번트 세이버, 어쩌다가 얹혀사는 린과 늘상 오기 때문에 이젠 다른 집에서 자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힘든 사쿠라와 이리야, 식사 때만 철두철미하게 챙기는 4차 성배전쟁 당시의 아쳐- 길가메쉬, 그리고,

랜서.

기묘한 느낌이다. 다섯 손가락을 훌쩍 넘는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잠시 장바구니를 내려다본다. 별다른 이상은 없다. 파, 달걀, 돼지고기, 당근, 상추.... 몇 가지를 짚어봤지만 잊어버린 건 없다. 그렇지만, 기묘하게 짐이 가벼워진 것 같아, 아쳐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로?”

“응?... 아니다.”

 

이리야가 깔깔 웃는다. 해맑은 표정으로 손에 든 붕어빵을 뜯는다. 오물거리는 입술과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귀엽다. 하얗고 하얗다. 햇빛만 닿아도 녹아버릴 것 같은 아련한 누이에게서 아쳐는 눈을 떼지 못했다.

 

“시로, 빨리 가자. 곧 저녁때야.”

“아직 이르다, 이리야. 다섯 시도 채 못 되지 않았나.”

“치, 난 배고프단 말야. 빨리 가.”

“간식을 먹기에도 너무 늦었다. 조금 기다리도록.”

“시로는 너무 엄해-.”

 

툴툴거리지만 기분나쁘지만은 않은 듯하다. 왜 그렇게 기쁜 얼굴로 통통 튀어다니지, 라고 무심결에 중얼거렸던 아쳐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 봉지를 단단히 잡았다.

기묘하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창궁]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거리.

 

 

 

 

봉투는 무거웠고, 늘어놓은 요리 재료 또한 많았다. 한 손에 꼽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니 그만큼의 식재료가 드는 것도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는 세이버의 식탐을 조금 뒤로 밀어두기로 하자. 세상에는 알아봤자 좋을 것 없는 사실들이 널려 있는 법이다.

 

카레를 하기로 했다. 마파두부에 질려 있는 그들에게 카레가 그닥 좋아보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맵지 않게 하겠다- 라고 이야기해 놓았으니, 기대한 만큼의 맛을 보여줘야 하겠지. 사온 카레가루와 당근, 양파를 꺼낸다. 조금 잘게 써는 것이 좋으려나. 일단 이리야를 배려해주는 게 좋겠지. 잠시 바깥을 둘러보다가 카레용 고기를 조금 더 많이 사올 걸, 하고 후회해본다. 남자 서번트만 셋이다. 조금 넉넉하게 넣어도 좋을 것을 그랬다. 국은 가볍게 하자. 쇠고기무국 정도로 해도 나쁘진 않겠지. 아니, 좀 더 매운 걸로 할까..... 아, 저 교회파가 있었다. 그래도 톡 쏘는 정도의 매운맛은 좋아하겠지.

 

도마소리는 일정하게 울렸다.

 

 

 

미안해 미안해. 시로가 좀 아팠잖아. 혼자 요리 준비하는 거 힘들지 않았어?

힘들지 않았다.

하필이면 사쿠라까지 같이 앓아누워버리다니. 부부는 일심동체라지만.

그건 그렇고 원하던 물건은 산 건가.

아아, 뭐. 오늘은 카레인거야?

편하게 했다. 환자들을 위한 죽도 쒀 놓았으니 먹이면 된다.

설마 독 탄 거 아니지?

에미야 시로에게야 그러겠지만, 상대가 사쿠라인데 그럴리가.

우와, 여전하잖아.

 

아무렇지 않은 대화. 그렇지만 무언가가 없다. 식사를 다 하고 설겆이를 할 때까지, 귀에 이명이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인다. 이상하다. 어째서 설겆이감이 이렇게 많아 보이는 걸까. 왜 이렇게 멍해지는 거지. 몸의 상태를 점검해봤으나, 전혀 문제가 없다. 패스쪽도 그렇고, 마력쪽도 그렇다. 고개를 갸웃하며, 디저트를 원하는 세이버의 입맛에 맞추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준비한다.

아이스크림은 네 개가 준비되었다. 자신은 원체 잘 먹지 않는 편이니, 모자람이 없는지 다시 세어 보아야 한다. 린, 세이버, 이리야, 길가메쉬.

 

 

아,

랜서의 것이 없다.

 

아,

랜서가 오늘은 오지 않았다.

 

 

잠시 멍해진 뇌를 움직인다. 뉴런에 새로운 정보가 생성된다.

오늘은 랜서가 오지 않았다.

 

 

 

 

 

그래, 감기라고 했다. 요즘 감기가 유행이니까. 그나저나 서번트가 감기라니 어이가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죽이라도 길가메쉬 편에 싸주어야 하는 걸까.

 

쟁반에 아이스크림 넷을 들고 나간다. 마음이 복잡하다.

 

 

어?

 

 

 

 

 

 

 

 

 

 

 

 

 

 

 

다음 날에는 비가 내렸다. 봄비라기에는 얼음의 차가움이 숨어 있는 듯, 뻗은 손에 닿은 빗줄기에는 얼음이 서걱하고 숨어 있었다.

 

“여어, 형씨. 비 맞는다고. 뭐 하는 거야?”

“... 랜서?”

“뭐야? 그 말투는.”

 

아, 비를 맞고 있었구나. 문득 내 상황에 웃음이 난다. 장을 보러 왔지만 비가 쏟아져서 딱히 장을 볼 수도 없게 되어버려서,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래도 아직 에미야 시로와 사쿠라는 낫지 않았는데, 체력도 좋군.

 

“다 나은건가.”

“아아, 내 체력을 물로 보지 말라고.”

 

작게 웃었다. 나도 안 걸린 감기에 걸려놓고 말은 좋군.

 

“우산이 너무 휘황찬란하다는 말은 말아줘. 이거 그냥 성당에 있던 거 들고 나온 거라, 나도 펼치고 나서야 저런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붙었다는걸 알았다구.”

“뭐, 신경쓰지 않는다. 그럼 장을 좀 보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나?”

“얻어먹는 처지에 뭐. 당연하지 않아?”

 

 

회색빛이었던 하늘이 조금 하얗게 바뀐 것도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은, 조금,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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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카페 UBW 전체 참여 30제 중 20제,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자리입니다.

 

여전히 차의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비루함을 자랑합니다(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