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목숨을 살려준 이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을 거짓이라 치부하며 종국에는 자신을 배신했다. 그래도 구해 주었다. 왜냐면, 자신의 이상이었으니까.
소년의 이상론은, 현실 속에서는 절대적인 이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만을 향해 달려간 삶은,
이상(理想)이 자신을 배신하는, 파국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차갑게 목에 걸렸던 형장의 올가미를 기억한다. 그것은 그냥 밧줄일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신체가 파괴되어 ‘움직인다’는 행위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꼴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도, 가끔씩 그 때가 기억난다.
목에 차가움이 걸린다. 손목은 등 뒤에 묶여 있다. 아니, 어차피 묶이지 않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무리한 투영으로 인해 신경은 마비된 지 꽤나 오래였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 느낌은 그 푸른 기사와의 첫 대면처럼, 온 몸에 남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죽음의, 공포’ 라는 것이.
그리고, 그 환영이 지금, 문득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분명 마스터의 탐색을 위해 신토의 가장 큰 빌딩 위에 서 있다가, 영웅왕의 쏟아지는 보구를 맞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중에 룰 브레이커 -파계해야할 모든 부적- 가 있었음을 진즉 깨달았어야 했다. 정신이 든 순간, 이미 계약은 깨져 있었고, 영웅왕의 무구들로 인해 상당한 출혈까지. 진퇴양난. 도망치자니 피할 틈을 주지 않고, 그의 창고에서 무구들이 쏟아지리라는 것은 결코 예상치 못할 일이 아니었다.
“상당히 재미있었다, 네 재롱은. 그러나 너도 종국엔 Faker. 진짜인 이몸과는 상대조차 되지 않겠지. …거기다, 그렇게 마력이 닳아진 꼴에다 마스터까지 부재. 상당히 재미있는 결전인가.”
“재미있는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막막하게 잊으려고 노력하며 그런 마음을 숨기기라도 하듯, 아쳐는 길가메쉬에게 무심하게 되물었다. 간장막야를 투영하기 위해 현계하고 있던 마력을 손 쪽으로 돌린다. 이 남자에게 어떠한 상처라도 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성미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인데, Faker. 짐이 친히 자비를 베풀겠다는 소리이다.”
“무슨- ?”
아쳐가 행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엔키두가 아쳐의 자유를 포박한다. 당혹스럽게 몸을 비틀어 보지만, 현격히 약해져 있는 그에게는 엔키두를 끊을 힘조차 없었다. 길가메쉬는 천천히 아쳐에게 다가와서는, 작게 속삭였다.
“그래, 짐이 거짓된 네놈을 종자-Servent-로 삼겠다는 것이다. 짐의 넓은 아량에 탄복해라. 거부는 용납지 않는다.”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라니. 나는 이미 수육(受肉)한 존재다. 충분히 마스터의 자격이 있지. 게다가 이몸이 네 마력을 충당한다 해도 고작 왕의 재보(Gate Of Bablyon) 몇 번 여닫는 정도의 마력량이겠지. 그 정도라면 짐에게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양이다. 불만은 듣지 않도록 하지. 만일 거부한다면-
그 계집과, 네가 그렇게 증오하던 잡종도 같이 죽여주마.”
멈칫.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린다. 저 왕은, 분명히 할 수 있다. 본능이, 수많은 전투에 단련되어 온 신경이, 이성이 고한다. 저것은, 사실이라고.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압박으로, 영웅왕은 자신에게 고한다. 여기서 승낙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죽을 것이고, 그 뒤를 린과 - 시로가 따르게 될 것이라고.
“자아, 선택해라. 나와 계약하겠나?”
“… 아아…. 나는, 너를… 내 마스터로 인정하겠다….”
망설임 끝에 끝에, 짜낸 말이었지만 길가메쉬는 그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곧 아쳐를 엔키두에게서 해방시켰다. 아쳐는 자신의 마력이 낯선 파장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길가메쉬는 왼팔을 걷어 령주를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
“뭐, 이런 것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하나 써 볼까. 그래, 령주에 고한다. 나는, 내 Servent에 대한 절대명령권을 요한다.”
“무슨, 바보같- 욱?!”
린은 굉장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서번트에 대한 절대명령권’이라는 무기한의 어이없는 절대명령권에 자신이 랭크다운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린의 마력총량의 수백 배는 되는 영웅왕의 령주는, 거의 이상상실에 가깝게 자신을 밀어붙였다. 한마디로, 령주 하나로 자신에게 개목걸이를 채운 거나 마찬가지.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 된다. 이것은 반은 본능으로 알아치릴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뇌리에서, 자신의 직감보다 더 강력하게 자신을 옭아매는 것은-
이것은, 절대, 거부할 수 없다. 는, 확신에 가까운 명령이었다.
령주 한 번으로, 령주에 해당하는 절대명령권을 무한대로 얻은 셈인가. 아쳐는 무심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견딘다. 그러나 몸은 공포로 얼어붙어, 옴싹달싹 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어느 정도 운용하려고 할 때쯤, 길가메쉬는 피식 웃으면서, 그에게 고해왔다.
“그래- 그럼 처음엔 무엇을 명령할까…?”
그의 웃음이 서늘하게 아쳐의 속을 얼어붙게 했다.
“흠…, 그럼 우선, 너의 보구는 결코 쓸 수 없다- 로 해 둘까.”
“웃-?!”
우와, 엄청난 페널티. 혹시 몰라서 영창에 의한 투영을 강행하려 했던 손에는 마력이 아예 쥐이질 않는다. 게다가 랭크다운 정도가 아니다. 강제로 영창하려면 몸의 상태가 아예 보통 인간의 상태로 돌아가버린다. 보구를 쓰고 싶으면 목숨을 걸어라- 인가. 이건 가히, 공포에 가깝다. 아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땀투성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느끼고 허한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좋아. 그럼 성가신 건 처리했군. 따라와라. 페이커. 짐의 서번트로써.”
아쳐는 눈을 감았다.
눈앞의 이 남자에게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정신을 놓을 것 같았지만 놓을 수 없는 것이 차라리 더 고통스러웠다. 몸은 비틀비틀, 길가메쉬를 따른다. 길가메쉬는 아쳐의 낭패감에 젖은 얼굴을 보며, 정말로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 서번트는, 분명 자신의 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한참 낮은 스테이터스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덧붙이자면 귀찮은 감정까지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수호자’로서 영령이 된 주제에, 상당히 비뚤어져 있는 모양. 상관은 없다. 자신의 흥미를 끈 것은 일단 자신의 것이다.
“아쳐.”
“…?”
아쳐는 자신을 부르는 길가메쉬의 목소리에 땅을 바라보던 시선을 그에게 맞추었다. 길가메쉬는 그에게 커다랗고 빨간 로브를 건네주었다. 그냥 보기에도 강한 항마력을 가진 그 성물(聖物)은, 자신의 성해포보다 몇 갑절이나 강력한 보호구였다.
“왜…?”
“그런 약해빠진 성해포는 짐의 취향에 어긋난다. 뭐, 이거라도 있으니 대충 걸치고, 나중에 좀 더 좋은 보호구로 찾아주도록 하지.”
“…….”
아쳐는 잠시,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길가메쉬에게 굴복하긴 했으나, 아쳐는 여전히 길가메쉬를 따를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입술을 으득 깨물며, 아쳐는 거부의 손짓을 표명했다. 길가메쉬는 얼굴을 찌뿌렸으나, 포기하는 듯 로브를 다시 받고는, 그것을 펼쳐 직접 아쳐의 몸에 걸쳐주었다.
“-?”
당황한 듯 아쳐가 길가메쉬를 쳐다보았으나, 길가메쉬는 피식 웃고 말 뿐,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네놈의 자존심이란 것이겠지. 묻지는 않는다만, 다시 이런 일이 있을 경우엔 용서치 않겠다. 지금은 짐의 기분이 상당히 좋으니 용서하마.”
의외의 대답에 놀란 아쳐와는 달리, 길가메쉬는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로 아쳐에게서 뒤돌아섰다. 아쳐는 로브를 꽉 쥐었다. 강한 보호력이, 자신을 감싸주는 것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 이 정도라면 길가메쉬의 황금 갑옷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것을 자신에게 줄 이유는 없을 텐데, 왜-?
“… 가자.”
아쳐는, 묵묵히 길가메쉬의 뒤를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그의 내심은, 도저히 짐작하기 어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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