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로는 언제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기둥 제도’의 폐지 후, 모코나는 사라졌고 부서지기 직전의 세피로는 아름다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화렌도, 티제타도, 오트잠도 스스로의 침략을 사과했고, 순순히 물러갔다. 특히, 오트잠은 이글을 적이었던 세피로의 마법기사에게 맡겨두는 것을 못마땅해했지만, 그의 치료가 이곳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한 후에는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글이 허락한 일이었으니까.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국가 전체가 활기를 띄었다. 마법기사들은 자주 놀러왔고, 놀러올 때마다 선물을 한아름 들고 왔다. 히카루는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란티스와 굉장히 친해졌다. 어느 정도냐면, 세피로에서 맨 처음 그를 찾을 정도였다. 어느 누구도 입밖으로 내지 않았고 그녀조차 뚜렷이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인정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무뚝뚝한 란티스는 히카루 앞에서만큼은 조금 말이 많아지고 뚜렷이 표정을 드러내고 더 부드러워졌다. 히카루는 이따금 란티스 앞에서 얼굴을 붉히기도 했는데, 그녀의 당당한 성격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매우 흐뭇해했다.
또한 관계가 확실해진 커플도 존재했다. 페리오와 후의 관계가 그랬다. 에메로드 공주가 소멸한 이후의 세피로에서 만난 이후로부터, 그들은 확실히 사귄다는 티가 났고, 후와 페리오도 그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왕족이래봤자, 이젠 존재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주위의 말에는 신경쓰지 않아.” 라고 말하는 페리오라던가, “이미 반지까지 받았는걸요.” 라고 웃으며 말하는 후에게서는, 원숙한 커플의 느낌이 넘쳐흘렀다. 란티스와 히카루가 서로 손 잡는 것으로도 망설이고 망설이며 뺨을 붉힌다면, 페리오와 후는 같이 손 잡고 다정하게 데이트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도 그랬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커플을 매우 축하해 주었다. (물론 히카루와 란티스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우미는 조금 달랐다. 우미는 다른 커플의 사정을 세세하게 알아가며 히카루나 후의 등을 떠밀었지만, 그녀 스스로는 아스코트에게 받는 것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행동했다. 아스코트가 우미 앞에서만 얼굴을 붉힌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아마 우미는 아스코트의 뺨이 원래 붉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평화로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심지어는 제작사 프레세아도, 마법기사들과 어울리고 오랜만에 만끽하는 평화에 잠시 잊고 있었다. 평화로운 세상에는, 그 평화를 이끌기 위해 반드시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의 일을, 주위의 행복을 끊임없이 염원하며, 모두 맡은 단 한 사람이 있음을.
전쟁은 끝났지만, 많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세피로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가 필요했다. 그녀들의 행복은 현재와 미래를 아름답게 울릴 강력한 염원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그것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국정이라는 것은 그렇다. 아무리 주위 국가가 침략을 포기했다 하더라도 그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개선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서류들이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화는 왔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불안감이 존재하고, 그 불안감은 세피로에서는 마수의 생성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마수도 퇴치하면서 그들에게 그들이 지탱할 수 있는 평화가 왔다는 것을 알려야 했으며, 그 모든 것을 관리하고 조정하려면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했다.
그것을 크레프는, 스스로 받아들였다.
모두가 평화와 행복에 취해 있을 때, 그 혼자만이 현실을 꿰뚫어보고 착실히 모든 것을 다지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무리하고 있었다.
“모두 불러서 미안하군.”
크레프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크레프는 들고 있던 스태프를 가볍게 휘둘러 모든 사람에게 앉을 의자와 따뜻한 음료를 주었다. 그리고는 스스로도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이네요, 크레프.”
“그래요. 성에서도 별로 못 보았던 것 같은데.”
모두들 걱정스러운 듯 한 마디씩 던졌지만, 크레프는 가볍게 웃음으로써 그 질문에 모두 응했다.
“모두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군.”
“오랜만에 온 평화니까요.”
프레세아가 웃으며 답했다.
“아아, 세피로는 에메로드 공주의 통치 이후로 가장 평화롭지 않은가. 나도 최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많이 보아서 그런지 이런 평화가 매우 기쁘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도사. 이런 시국에, 당신이 우리를 부를 만한 일이 있습니까?”
“…”
란티스의 질문에 조금 곤란한 듯이, 크레프는 스태프를 다시 한 번 더 휘둘렀다. 다 마신 잔들이 스르륵 사라졌다. 모여앉은 그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크레프는 본래, 할 말이 막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기묘하게 말이 없다. 오늘따라. 그가 모두를 부른 것은 분명 어떠한 말을 하기 위해서일텐데, 이상하게 시간을 끌고 있다. 깨끗하게 사라진 잔을 바라보며, 란티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란티스. 부탁이 있다.”
“무슨 일입니까?”
란티스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란티스와 크레프를 바라보았다. 앉아 있는 란티스에게 크레프가 천천히 다가갔다. 앉아 있는 란티스의 앞에 서서, 크레프는 뚜렷하게 말했다.
“그대가, 내 뒤를 이어 ‘도사’의 칭호를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모두들 당황을 금치 못했다.
“도, 도사. 그게 무슨…? 저는 아직 도사의 칭호를 받을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란티스도 더욱 당황했는지, 잠시 말을 더듬었다. 그렇지만 크레프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아스코트도 내가 가르쳤고, 내 제자들은 많아… 물론 나도 이 칭호를 아스코트에게 내려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없어.
크레프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는,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갔다.
그날 저녁, 사람들은 다시 모였다. 크레프는 없었다. 그는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돌아갔다. 그리고 프레세아는 후회했다. 어째서 자신이 몰랐던 것인가. 언뜻 봐도 예전보다 말랐던 그의 몸, 언제나 서류를 잔뜩 들고서는 웃으면서, ‘이번엔 어디로 가기로 했나?’ 라고 묻는 그의 얼굴. 그래, 할 일은 많았었다. 모두들 그것을 모른 체한 것뿐이다.
모른 체하지 않은 사람은, 크레프 하나 뿐이었다. 모두들 침울한 표정이었다. 특히 우미는, 죄책감과 더불어 기묘한 답답함까지 몰려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크레프가… 한 말의 뜻을 모르겠어요.”
모두들 모여 있어도 침묵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우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다니, 무슨 뜻일까요? 혹시…수명이…”
“그럴 리가.”
페리오가 단호히 부정했다, 란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명이라는 건 우리에겐 아무 것도 아니야.”
“물론 도사는 오랫동안 살아왔어.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야. 우리들에게 수명이 있는 건 오래 사는 만큼 오는 허무감을 누구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니까…”
“그런데.”
프레세아는 차갑게 그 말을 끊으며 덧붙였다.
“지금, 여러분은 행복한가요?”
란티스와 히카루는 서로의 손을 꽉 쥐었다. 페리오와 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스코트는 우미의 어깨를 살짝 짚었고, 우미는 아무 생각없이 프레세아를 바라보았다. 프레세아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생각을 말해 보세요. 지금, 도사 크레프는 행복할까요?”
모두들 잠시 몸을 굳혔다.
“아무나 대답해 줘요… 크레프를 살아있게 하는 ‘의지’는 어디에 있나요? 무엇인가요?”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 크레프는, 세피로의 성 안에 있다.
마치, 에메로드 공주와 같이, “기둥” 과 같이,
세피로를 떠받치면서.
그녀들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를 세피로에 바친.
지금의 크레프는,
행복한가?
'소설 >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법기사 레이어스/ 크레우미] Give a reason for life 3 (0) | 2010.06.18 |
---|---|
[마법기사 레이어스/ 크레우미] Give a reason for life 2 (0) | 2010.05.16 |
[제간x지이나] 낯설고 편안한 온기 (0) | 2010.01.11 |
[타이포프] 5년 뒤의 만남. (0) | 2010.01.11 |
[커플없음] 손길이 상냥하지 않더라도. (0) | 2010.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