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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마왕/ 마왕마심] 마왕은 화내지 않는다.

보랏빛구름 2014. 7. 14. 18:49

 

마왕은 그렇게 크게 분노한 적이 잘 없었다. 그의 성정은 꽤나 조용하고 얌전한 축이었다. 물론 심심하다며 온 마왕성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보고 잠시 의문을 품는 이도 있겠지만, 이전 마왕인 플뤼톤이 천계를 엎어버리기로 계획하면서 했던 수많은 짓거리들을 진지하게 살펴본다면 현 마왕의 행동은 기껏해야 농지거리 따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알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마왕성 내 주 거주자들인 소악마족에게는 그저 지옥일 뿐. 덧붙이자면 여기는 마계니 다른 말로 지옥은 맞다(....)

 

그리고 마심. 소악마족을 제외하고 마왕성에 눌어붙어 있는 이는 마심 뿐이었다. 다른 이들이야 마왕성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 엔간한 일이 없는 한은. 이전 마왕의 흉폭성도 한몫했겠으나, 마왕성 안에서 심심하니까! 라는 외침과 함께 날아가는 빨강 파랑 노랑 점들을 본 순간, 그들은 마왕성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그대로 U턴시키곤 했으니. 그래서 모든 마물들의 궁금증은 왜 마심이 마왕성에만 붙어있느냐였다. 마심보다 힘이 약한 이들도 제 권역을 차지하고서 목소리를 높이려고 애를 쓰는데 왜 굳이 마왕성에만 있을까. 정하면 바람의 협곡으로 들어가 제 아비가 했던 것을 따를 수도 있는 일일텐데. 악마들은 그런 것을 뜬금없이 떠올리고 고민하다 지 알아서 하겠지라는 마이웨이로 끝마무리를 짓곤 했다.

 

물론 마심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단 바알베리트, 자신의 아버지가 바람 계곡을 다스리고 있었고 본인 또한 어느 정도 그 곳을 일으켜 세워야 하지 않은가, 하는 뜬구름적인 생각도 해 보았었다. 하지만 끝끝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이 멸망한 후로, 제 어머니가 저를 남기고 죽은 후로 단 한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던 곳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한 '무리'를 도맡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책임이 없는 거로군."

 

심드렁하게 마왕은 한 마디를 남겼지만, 그 또한 마심이 마왕성을 벗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감에 가까웠지만, 현실성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제 코앞에서 대놓고 "네 약점을 찾아서 꼭 쓰러뜨릴 거다!" 라고 호언장담한 녀석이 마왕성을 벗어난다? 마심은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언행이 일치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 남자가 제게 걸어와서 당돌히 마왕성을 나갈 것이고, 2인자도 때려치겠다는 말을 하게 되니 마왕의 기분은 매우 이상해졌다.

 물론 마심 또한 갑작스럽게 생각나 말한 것이었다. 이대로 몇백년간 세월을 까먹다가는 정작 제 일족 하나 재건하지 못할 테니, 라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마왕에게 말을 꺼내고 나니 꽤나 그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어서, 에라 다 때려치우고 나가자! 로 마음이 굳어지고 있었다.

 

"나를 쓰러뜨린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여전히 유효해. 하지만 이대로 시간만 보낼 순 없지 않나. 바람 일족을 재건할 책임도 있고."
"그 일족은 어차피 전부 죽었다.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 아무튼. 어차피 2인자도 내 멋대로 하겠다고 한 게 아니냐. 내버려둬라."
"내가 그렇게 2인자를 만만히 뽑았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뭐라고? 순간적으로 마심의 머리를 치고 지나간 건 그 단어였다. 4천왕 뽑을 때의 그 건성을 제가 아는데 굳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에잇, 여튼 난 갈거다. 일 있으면 부르던가!"
"너는 나가지 못한다."

 

무거운 마왕의 한 마디였다. 마심이 얼굴을 콱 찌뿌리고 등을 돌렸다. 제깟 게 뭐라고 (마왕) 저딴 명령을 내리느냔 말이다. 죽어도 남 말을 듣지 않을 제 자존심을 부러 꺾으려는 수작일거라 마심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는지, 등 뒤로 돌았는데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마기가 홀 안에 가득차고, 무겁게 몸에 내려앉았다. 마심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베르제뷔트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떤 마심은 갑자기 약간 불안해졌다. 그의 촉을 따라가자면 마왕은 화가 나 있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전에 듣보잡이 내가 2인자 할거임! 널 쓰러뜨릴거임! 개드립을 쳤을 때 저렇게나 화낼 것이지 왜 뜬금없이 때려치고 나가겠다는데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왜 말이냐!?"

"나는 네가 2인자를 그만둘 거란 생각도, 마왕성을 나갈 거란 생각도 들지 않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마심."
"그.... 그래서 어쩌라고!"

"너는 나갈 수 없어."

"아 그래서,  전쟁할 일도 없고 별로 할 것도 없는데 왜 잡아두려는 거냐고!"

 

마왕은 갑자기 굉장히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심 근처의 농도짙은 마기가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심심하니까."

 

 

 


마심은 그 이후에는 빠져나갈 생각 자체를 그만두었다. 그래 생각을 하면 지는거다. 마왕이 생각따윈 할 리 없지. 궁시렁궁시렁궁시렁궁시렁. 마심은 입을 댓발 내밀었지만 순순히 항복하기로 했다. 어차피 무력을 쓰면 제가 지고 말마따나 결혼할 생각도 없는데 집안 일으키기는 개뿔 에이 몰라 알아서 되겠지 같은 막장생각으로 뻗어나간 것도 이유긴 했다. 마심이 궁시렁궁시렁궁시렁하는걸 전부 다 들은 마왕은 느긋하게 마심에게 다가가 싸다구를 날렸다. 감히 내가 허락지도 않았는데 2인자를 때려치려 하다니!  으아니 ㅅㅂ...... 마심은 유유히 날아갔고 마왕은 느긋하게 다시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여튼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다. 마왕은 느긋하게 말하며 빨강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마심이 기어들어오거든 먹을 스틱스 강물을 준비하라고. 마왕은 언제나 꼼꼼하게 그의 아랫사람을 돌본다. 물론 그 진심을 아는 것은 마왕도, 마심도, 빨강이도 아닌 집사 하나뿐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