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궁금하군, 너 왜 무영님 말을 그렇게 잘 듣는 거냐?”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
오랜만에 집에 아무도 없는 날이었다. 진이는 학교에 갔고, 무영은 별 일 없으니 일하러 나가겠다고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하나린과 아라는 장을 보러 나갔는데, 새하는 필요한 약초를 사 오겠다고 그 팀에 꼈고, 천량은 아라양을 그대로 내보낼 수 없다며 따라붙었다. 결국 볕 좋은 날 덩그러니 이매와 은율 둘만 남아 있었다. 이매는 평소처럼 지붕에서 볕을 쬐고 있었고, 은율은 뭐 먹을 게 없나 부엌으로 먹을거리를 찾아 들어갔다. 하지만 주위는 조용했고, 둘이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그닥 어려움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 않나. 네 더러운 성격으로 그렇게 무영님 말을 잘 들을 줄은”
“누가 누구 말을 들어? 이건 뭐, 신종 시비냐.”
“헛소리는 아니지 않나. 선비탈 찾으러 경상도로 내려갈 때도 끌려‘가 줬’고. 원래 네 성격이라면 널 잡아끌고 가려 드는 무영님 팔을 잘라도 딱히 놀라진 않았을 것 같은데.”
집 식탁 위에 굴러다니는 사과를 집어들며 은율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거기다 첫 만남에선 무영님이 네 얼굴에 상처도 냈지 아마. 딴 건 몰라도 넌 얼굴에 상처낸 녀석에겐 가차없지 않았나. 내가 중간에 난입했다지만, 네 성격이라면 나중에라도 무영님 허벅지에 칼이라도 박아 넣을 줄 알았는데.”
“…뭐냐 그거, 대놓고 보복하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답지 않다는 거지.”
사과를 한 입 씹어 삼키며 은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처음에 얼굴에 총알을 냅다 맞았을 땐 딱 그 새낄 토막 칠 생각밖에 안 했는데 말야…… 대답 없는 은율을 바라보다 이매는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유진님이 무영님을 여러모로 신경쓰고 있으니 그래주는 건 고맙지만… 신기하긴 하군.”
“신경 안 쓸 것처럼 굴더니, 이래저래 생각이 많네 너도.”
“놀랐을 뿐이야. 네가 그 정도로 당하고서 보복하지 않은 상대는 나를 제외하곤 무영님밖에 없으니까.”
“…뭐 그 때는 오해가 있기도 했고. 좋던 싫던 애송이왕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데 함부로 건드렸다간 객식구들이 줄줄이 들고일어날 것 같으니.”
“흠…”
이매가 새끼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은율은 이매가 뭔가 말할 것이 있나 싶어 기다렸지만, 이매는 곧 말없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굳이 말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건가. 은율은 심지만 남은 사과를 쓰레기통에 갖다 넣으면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은율은 이매의 말을 다수 긍정하고 있었다. 그래, 자신은 무영을 봐주는 것이 맞다. 밥버러지 취급을 하던, 남는 손 취급을 하던 적당히 맞장구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긴 하다.
사실 은율은 무영이 저를 마치 제 아랫것처럼 취급한다 해도 반발할 마음은 없었다. 무영은 저를 위해 은율을 움직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영이 은율에게 이래라저래라 시켜대는 것들은 보통 유진이 관계되어 있었다. 유진, 다시 말하자면 애송이왕 옆에 탈 중 최강이라는 이매가 바싹 붙어 있는데도 그랬다. 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혼자 날을 세우고 파르르 떨다가, 일이 터졌다 싶으면 은율을 부려먹곤 했다.
그래서 그런가. 은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텅 빈 집은 조용했다. 이렇게 조용한 집에서 할 건 낮잠밖에 없으니 심심하다. 산책이나 할까 싶어 은율은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저녁 시간은 정해져 있으므로, 밥 때만 맞춰서 들어오면 된다.
문 밖을 나서 담벼락을 지날 때쯤, 얼마 전의 기억이 흘러내렸다. 어느 날엔가 담벼락에 무심결에 기대어 멍 때리다 무심코 엿들은 이야기였다.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돼? 진이도 딱히 반기는 거 같지 않은 식객이 몇 명이나 들어앉았는지 알아? 거지들도 아니고 나가라면 알아서 갈 데 찾아 나가겠지.”
아마 집 안에 식객이 하나 둘 늘었을 때였던 것 같다. 이매를 제외하면 첫 번째 식객이 자신이었고, 그 뒤로 아라와 하나린이 따라붙었을 때였다.
한창 예민해진 무영의 목소리가 날을 세웠다. 이매도 답지 않게 짜증이 가득 찬 날카로운 말로 맞붙었다.
“그러기엔 아까운 인력들인데요.”
“하, 저 밥버러지들이?”
“당신보단 유용하죠.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제 몸 하나 간수 못 할 당신보단 훨씬 믿음직하지 않겠습니까.”
“뭣,”
“기억이 안 나시는 모양인데, 당신을 대놓고 습격한 애송이들도 제대로 못 잡은 게 누굽니까.”
“-…”
“밥버러지라고 해도 제 몸뚱아리는 물론이거니와 남도 지킬 수 있는 녀석들입니다. 내버려 두시죠. 먼저 들어갑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지 않았을 리 없다. 용마도 있고, 능력도 차차웅 중에서는 제법 강한 축에 속했을 테니 자존심에 금이 꽤 갔을 것이다. 하지만 뼈아프게도 이매의 말엔 틀린 게 없었다. 이 집의 객식구들은 유진을 빼면 전부 ‘탈’들이다. 차차웅 중 탑급 능력자, 거기다 겉보기와는 달리 몇 백년 이상을 살아오며 쌓아온 경험치도 상당하다. 그들이 보기에 무영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장 어린 차차웅인데다가, 가장 약한 인물인 것이다.
그래, 생각해보면 무영은 아직 태어난 지 채 몇 십 년도 되지 않은 차차웅이다. 너무 어린데다, 차차웅 세계와도 떨어져 살아온지라 그 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그래도 이매가 말이 심했지, 그 날은 유독.’
그 날, 은율은 뇌를 강타하는 팩트에 정신을 놓은 듯 비칠비칠 집으로 걸어들어가는 무영의 뒤를 밟았다. 그러면서 찬찬히 고민했다. 무영은, 누군가의 아래보다 위에 있는 게 지나치게 익숙한 이였다. 하지만 애송이왕의 집에 거하는 모든 이들은 누군가에게 굽힐 위인들이 아니었다. 이매는 두말 할 것도 없고, 아라나 하나린은 무영이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분노와 짜증에 가득 찬 저 녀석은 제 앞에 꿇을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 그게 문제다.
은율은 오랜 시간 살아온 경험으로, 제 자존심을 내세우는 뻣뻣한 인간들의 최후를 몇 번이고 보아왔다. 제 자존심을 이기다 못해 부러져버려, 끝내는 죽어버린. 은율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 까칠하고 날카로운 어린이에게는, 약간의 물렁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직 너무 어리다. 인간 사회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버린 차차웅은 스스로를 맹신하고 타인의 능력을 부정한다. 그 부정에 틈을 내어 신뢰를 얻기까지의 시간 동안만, 은율은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어차피 무영은 변화가 무엇인지 느끼지도 못한 채 금방 익숙해져 버릴 것이다. 이매는 원래 저런 놈이었나, 하고 생각하고 넘겨 버릴 것이다. 애송이왕이 제대로 왕의 직위를 넘겨받고 나면, 어차피 탈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금방 헤어질 인연인데 이 정도야 별것 아니겠거니 했다. 거기다 제 식성을 잘 맞춰줄 수 있는 인물이지 않은가. 은율은 보다 못한 용마가 제 주인을 부축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마음을 정했다.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이매의 눈매는 예리한 모양이었다. 알아 봤자 딱히 바뀔 것도 없지만. 만약 다음에 이매가 한 번 더 묻는다면 녀석이 너무 물러서, 너무 어려서 그렇다고 말하기로 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골목을 빙 돌면서, 담벼락 위에 선 고양이의 눈이 세로로 확장되는 것을 보며 은율이 웃었다.
사실 식객이고 그에게는 낯선 외부인이 뿐인 자신을, 그렇게 홀라당 믿어버리는 게 신기했다. 오해였다고 해도 서로에게 무기를 맞대고 살기등등하게 만난 인연이었다. 하지만 애송이왕이 제 존재를 인정하고 집에 받아들이자, 무영의 태도는 삽시간에 바뀌었다. 물론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 태도 변환에 걸린 시간이 고작 세 시간이라는 건 결코 평범하지 않으니까. 세 시간 안에 무영은 은율이 덮을 이부자리와 생필품을 갖춰 주었고, 저를 죽이러 올까 걱정도 없이 태평하게 옆방에서 잠들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뜬 은율은 제 옆방에서 깊이 잠든 무영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이 녀석 이러다 누군가한테 칼빵 맞고 죽지는 않을까 하는 하찮은 걱정도 해 주었다. 물론 그 때엔 녀석의 용마가 알아서 잘 처리해 주겠지만.
은율은 별 목적도 없이 걷던 길 끝에 무영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는 걸로 봐서 누군가와 통화중인 것 같았다. 무영도 은율을 발견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율이 한쪽 손을 들어 인사했다. 무영은 휴대폰을 귀에서 뗐다.
“여, 오는 길이냐? 애송이왕은 아직 안 왔을걸.”
“망할 탈쟁이가 잘 모셔 오겠지. 넌 잘 왔다. 마침 시킬 것도 있었는데.”
“넌 내가 아주 그냥 시다바리로 보이지?”
“소고기 무한 리필 상품권 2장 준다.”
“뭐 하면 되냐?”
무영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등을 돌린다. 저보다는 큰 등이 은율의 시야를 가렸다. 무영은 키도 은율보다 크고 덩치도 꽤 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어려서 걱정할 수밖에 없는 아이같은 느낌이라. 아까 선비가 필요한 약초 있다고 사 오라고 했는데 꽤 양이 많으니까… 무영이 앞장서며 말을 시작했고, 은율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천천히 따라 걸었다.
그래, 꺾이지 마라. 아직 꺾이기엔 너무 아까운, 어린 나이니까. 은율은 자신의 배려가 생각보다 더 오래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꽤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고보니 궁금하군, 너 왜 무영님 말을 그렇게 잘 듣는 거냐?”
“뭐?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오랜만에 집에 아무도 없는 날이었다. 진이는 학교에 갔고, 무영은 별 일 없으니 일하러 나가겠다고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하나린과 아라는 장을 보러 나갔는데, 새하는 필요한 약초를 사 오겠다고 그 팀에 꼈고, 천량은 아라양을 그대로 내보낼 수 없다며 따라붙었다. 결국 볕 좋은 날 덩그러니 이매와 은율 둘만 남아 있었다. 이매는 평소처럼 지붕에서 볕을 쬐고 있었고, 은율은 뭐 먹을 게 없나 부엌으로 먹을거리를 찾아 들어갔다. 하지만 주위는 조용했고, 둘이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그닥 어려움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 않나. 네 옛날 성격으로 그렇게 무영님 말을 잘 들을 줄은”
“누가 누구 말을 들어? 헛소리는 작작 해라 이매.”
“헛소리는 아니지 않나. 선비 찾으러 경상도로 내려갈 때도 끌려‘가 줬’고. 원래 네 성격이라면 널 잡아드는 무영님 팔을 잘라도 딱히 놀라진 않았을 것 같은데.”
집 식탁 위에 굴러다니는 사과를 집어들며 은율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거기다 첫 만남에선 무영님이 네 얼굴에 상처도 냈지 아마. 딴 건 몰라도 넌 얼굴에 상처낸 녀석에겐 가차없지 않았나. 내가 중간에 난입했다지만, 네 성격이라면 나중에라도 무영님 허벅지에 칼이라도 박아 넣을 줄 알았는데, 얌전하더군.”
“…뭐냐 그거, 대놓고 보복하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답지 않다는 거지.”
사과를 한 입 씹어 삼키며 은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처음에 얼굴에 총알을 냅다 맞았을 땐 딱 그 새낄 네 토막 칠 생각밖에 안 했는데 말야… 왜일까… 대답 없는 은율을 바라보다 이매는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유진님이 무영님을 여러모로 신경쓰고 있으니 그래주는 건 고맙지만… 신기하긴 하군.”
그 말을 끝으로 이매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은율은 심지만 남은 사과를 쓰레기통에 갖다 넣으면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은율은 이매의 말을 다수 긍정하고 있었다. 그래, 자신은 무영을 봐주는 것이 맞다. 밥버러지 취급을 하던, 일손 취급을 하던 적당히 맞장구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긴 하다.
사실 은율은 무영이 저를 마치 제 아랫것처럼 취급한다 해도 반발할 마음은 없었다. 무영은 저를 위해 은율을 움직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영이 은율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에는 보통 유진이 관계되어 있었다. 유진, 다시 말하자면 애송이왕 옆에 탈 중 최강이라는 이매가 바싹 붙어 있는데도 그랬다. 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혼자 날을 세우고 파르르 떨다가, 일이 터졌다 싶으면 은율을 부려먹곤 했다.
그래서 그런가. 은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텅 빈 집은 조용했다. 산책이나 할까 싶어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저녁 시간은 정해져 있으므로, 밥 때만 맞춰서 들어오면 된다. 유진이네 담벼락을 지날 때쯤, 아주 예전에 엿들은 기억이 흘러내렸다. 어느 날엔가 담벼락에 무심결에 기대어 멍 때리다 무심코 엿들은 이야기였다.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돼? 진이도 딱히 반기는 거 같지 않은 식객이 몇 명이나 들어앉았는지 알아? 거지들도 아니고 나가라면 알아서 갈 데 찾아 나가겠지.”
아마 집 안에 식객이 하나 둘 늘었을 때였던 것 같다. 한창 예민해진 목소리가 날을 세웠다. 그리고, 이매도 답지 않게 짜증이 가득 찬 날카로운 말로 맞붙었다.
“그러기엔 아까운 인력인데요.”
“하, 저 밥버러지들이?”
“당신보단 유용하죠.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제 몸 하나 간수 못 할 당신보단 훨씬 믿음직하지 않겠습니까.”
“뭣,”
“기억이 안 나시는 모양인데, 당신을 대놓고 습격한 애송이들도 제대로 못 잡은 게 누굽니까.”
“-…”
“밥버러지라고 해도 제 몸뚱아리는 물론이거니와 남도 지킬 수 있는 녀석들입니다. 내버려 두시죠. 먼저 들어갑니다.”
충격을 받지 않았을 리 없다. 용마도 있고, 능력도 차차웅 중에서는 제법 강하다 싶은 녀석이었으니 자존심에 금이 꽤 갔을 것이다. 하지만 뼈아프게도 이매의 말엔 틀린 게 없었다. 이 집의 식구들은 유진을 빼면 전부 ‘탈’들이다. 차차웅 중 탑급 능력자, 거기다 겉보기와는 달리 몇 백년 이상을 살아오며 쌓아온 경험치도 상당하다. 그들이 보기에 무영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장 어린 차차웅인데다가, 가장 약한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매가 심했지.’
그 날, 뇌를 강타하는 팩트에 정신을 놓은 듯 비칠비칠 집으로 걸어들어가는 무영의 뒤를 밟으며 은율은 생각했다. 이매는 누군가에게 굽힐 위인은 아니었다. 사실 아라나 하나린도 딱히 행동하는 축은 아니었고, 이쪽은 무영이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은율은 오랜 시간 살아온 경험으로, 제 자존심을 내세우는 뻣뻣한 인간들의 최후를 몇 번이고 보아왔다. 제 자존심을 이기다못해 부러져버려, 끝내는 죽어버린.
은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까칠하고 날카로운 어린이에게는, 약간의 물렁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직 백 년도 채 살지 못한 어린 차차웅이다. 인간 사회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버린 차차웅은 스스로를 맹신하고 타인을 부정한다. 그 부정에 틈을 내기까지의 시간 동안만, 은율은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어차피 무영은 금방 익숙해져 버릴 것이다. 이매는 제 변화에 원래 저런 놈이었나, 하고 생각하고 넘겨 버릴 것이다. 애송이왕이 제대로 왕의 직위를 넘겨받고 나면, 어차피 탈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금방 헤어질 인연인데 이 정도야 별것 아니겠거니 했다. 거기다 제 식성을 잘 맞춰줄 수 있는 인물이지 않은가. 은율은 용마가 제 주인을 부축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마음을 정했다.
은율은 별 목적도 없이 걷던 길 끝에 무영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영도 은율을 발견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율이 한쪽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여, 오는 길이냐? 애송이왕은 아직 안 왔을걸.”
“망할 탈쟁이가 잘 모셔 오겠지. 넌 잘 왔다. 마침 시킬 것도 있었는데.”
“넌 내가 아주 그냥 시다바리로 보이지?”
“고기 무한 리필 상품권 2장 준다.”
“뭐 하면 되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등을 돌린다. 저보다는 큰 등이 시야를 가린다. 아까 할미탈을 봤는데 할미탈이… 이야기하는 등 뒤로 은율은 피식 웃었다. 그래, 꺾이지 마라. 아직 꺾이기엔 너무 아까운, 어린 나이니까. 은율은 자신의 배려가 생각보다 더 오래 갈 수도 있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무영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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