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늘 이 하루가 마지막이길 바라곤 한다.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희망을 꿈꾸라고 했던가. 그런 글을 본 것 같다. 사실 그런 이야기는 나와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영감의 닦달로 눈을 떠서 내일 메뉴를 고민하며 잠들던 삶이 있었으니. 그 때에는 희망도 미래도 꿈꾸지 않았었다. 그래서일까.
인간들은 이래서 “희망”을 갖는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과거의 덧없는 흔적을 좇아 나를 불태우는 희망.
친한 친구가 죽었다. 내게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내가 ‘차차웅’인 것을 알고, ‘탈’인 것을 알았던 녀석이었다. 나는 차차웅이었고, 지나치게 강했다. 그 힘으로 뭔가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부수지 않을까, 혹은 누군가를 죽이지 않을까 겁이 나 매일매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느끼기에, 벽처럼 단단해 마음을 놓게 만드는 남자였다. 나와 같은 차차웅이자 탈이면서, 베고 죽이는 데 익숙한 ‘백정’. 그 이름만큼이나 완벽한 너의 칼놀림은 왜 네가 ‘백정’인지 납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안도했다. 내게 결코 죽지 않을 대상이 생긴 것에 대해서.
차차웅이면서도 그쪽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고, 대신 인간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나를 보면서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가 차차웅인 것을 알게 된 다른 차차웅들은, ‘하찮은 인간 따위와 친해지려고 굽신거린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시비를 걸거나, 빈정거리곤 했었으므로 그런 태도는 매우 낯설었다. 거기다 나와 말을 튼 지 얼마 되지 않아, 슬그머니 내가 일하던 곳에 자리잡아 버리기까지 했다. 같이 일하는 영감 등쌀에 몇 달 안 되어 도망치긴 했으나, 정말로 유쾌한 시간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집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 집에 얹혀 살면서, 처음으로 나는 술을 마셔 보았다. 혹시나 흐트러져 무슨 일이라도 날까봐 한사코 거부했던 그것은 내 기대보다 맛이 없었다. 무슨 맛이 나나 열심히 먹는 나를 옆에 두고서 녀석이 뭐라 했더라. 허우대만 멀쩡하다고 했던가. 그래, 여튼 나를 꽤나 비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 녀석 주량이 제법이었다. 둘이서 소주만 한 박스를 비운 것 같은데,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녀석이 해장국을 끓여 주었다. 해장국을 먹고도 계속 속이 울렁거려 그 날은 집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만 했다. 낯선 경험이었다.
그 사소한 경험을 함께 했던 이가, 죽었다.
다시 그 경험을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심장 한 쪽이 뻥 뚫려 버린 것 같다. 심장의 네 개 방 중에서, 방 하나가 자리를 잃어버린 느낌. 내 절망을 먹고서도 시간은 잘만 흘렀다. 그래,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주리라는 철없는 말을 믿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한창 기현상이 목격될 무렵이었다. 사람이 거대한 괴물로 바뀌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제 몸에서 돌 같은 무언가가 돋아나고, 병원에 도착할 때쯤에는 온몸에 그것이 번져나가, 끝내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새 왕도, 다른 ‘탈’들도, 새 왕과 친했던 몇몇 이들도 정신없이 바쁜 것 같았다. 아마도 ‘차차웅’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라는 어렴풋한 짐작이 들었지만 더 이상 그들과 관계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 친구가, 그들 때문에 죽었다.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사실, 죽인 사람은 따로 있다. 하지만 내 친구가 죽은 것이 그들 때문이라는 원망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노 섞인 원망에 그들이 바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낌새가 이상하단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려 노력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까.
“요즘 계속 팔이 근질거리는구만.”
“영감, 병원 저번에 안 갔어? 병원에선 뭐래?”
“별것 없다는데… 알러지도 없어, 이놈아.”
“벌레 물린 거 아니야?”
아무렇지 않게 했던 대화가, 끝내 전하지 못한 이별의 말을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 한 채.
가려움을 호소한 부위에 돌 같은 것이 돋아나고, 손 쓸 새도 없이 그게 자라나버려, 어느 샌가 영감이 영감이 아니게 되고, 괴물이 되고, 그 괴물이 나를 공격해서, 하지만 나는 영감을 공격할 수가 없어서…
몇 년이나 보지 않았던 탈들이 어느 새 나타나 상황을 정리하기까지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경찰이 온 것 같기도 하다. 그 날의 일은 이상하게 기억이 없다. 사실, 내 친구의 죽음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피를 흘렸던 것도 같은데. 반짝반짝 빛나던 눈동자가 빛을 잃어서는, 부드럽던 머리카락에 피를 가득 묻히고선 -
천천히 눈을 감는다. 모든 기억을 수면 아래로 잡아내린다. 이대로 영영 잠들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귓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괴물이 되어버린 영감도 사라지고, 탈도 사라지고, 망연히 앉아 있던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거는 목소리가 있다. 마치 최면처럼, 몇 번이고 다시 들리는 목소리.
“영감은 죽지 않았어.”
“살릴 수 있어.”
“괴물에서 다시 사람으로 돌이킬 수 있어.”
“그 방법을 우리는 찾고 있어.”
“너도 도와 주었으면 좋겠어.”
아, 그 덧없는 희망이란.
수면은 희망에 발목이 채여 저 멀리 떠나가버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아, 하늘은 파르스름하다. 좀 잠이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몸에 걸쳐 둔 이불을 벗어던졌다.
희망을 붙들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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