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닛-fate관련/-[fate]애절함 30제(금궁)

29 バラの種 (장미의 씨앗) Rose Letter

보랏빛구름 2007. 7. 12. 23:42
 

‘그 사실’ 은 적어도, 아쳐에게는 유효했다. 왜냐하면 당사자의 일이었으므로.



“…뭐라고?”

“네 집에 그냥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만?”


아쳐는 린의 반문에도 별 반응없이 대답했다. 분명 ‘벌써 귀가 나빠진건가.’ 라는 빈정거림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니,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왜? 아직까지 시로가 껄끄러운 거야? 아니면-”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뭐, 여러 가지다. … 어차피 너도 그 집을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하지만 불편할 텐데. 그냥 에미야 저에서 같이 살면 좋을 걸.”

“괜찮다. 그럼 나는 그곳에 있도록 하지.”


아쳐는 묵묵히 몸을 돌렸다. 린은 굳이 그를 잡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안다. 그러나, 이전처럼 다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자신을 다시, 그 낮은 울림으로

린, 이라고 불러주지 않는 이상은.







“아아…”

정말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쳐는 배를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 마력덩어리가,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마력 덩어리가 뱃속에 있다. 모 창병이라면 기분나쁘다면서 당장 배를 꿰뚫어버렸을지도 모를 이물감.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자신과 심박수가 같으리라. 자신의 마력을 나눠 가지리라.

비록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부정하는 자의 마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일단, 마력을 더욱 보충해야 할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린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상당히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게 뻔하다. 그렇기에 굳이 따로 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마력 보충을 위해서라면 많이 먹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아르바이트가 필요하다.


-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아쳐는 신문을 뒤적였다. 되도록 ‘얼굴 보이지 않고’ 하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며칠간 뒤진 결과, 새벽에 우유와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 오전 중 카페 설거지 아르바이트, 오후 늦게 식당 청소 아르바이트를 찾을 수 있었다. 아쳐의 가사스킬(응?)이라면 순식간에 해치우고도 남을 일들. 이 정도라면 아마 세이버처럼 먹어대도 괜찮을 법하다. 아쳐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와 만나지 않는 일 뿐.




먹을 것이 사실은, 잘 넘어가지 않는다. 구역질이 나서 도무지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고작해야 과일이나 생야채 정도. 익히거나 조리한 것은 아예 입도 못 댔다. 입덧이 심한 것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새벽녘이나 밤중에 잠이 깨어 요리조차 할 수 없는 순대나 때아닌 귤이 먹고 싶은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거기다 잠은 또 왜 그리 오는지. 아르바이트가 끝난 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빠르게 달린다면 5분 안에 토오사카 저택까지 올 수 있었다- 잠에 빠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마력은 원활하게 공급되었다. 린도 학교일에 바쁜 듯, 나에게는 그리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고밖에 치부할 수 없다.



“뭔가, 페이커.”


문앞에 Close 라는 말이 떠억하니 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들어오는 금빛의 왕. 아니-

…영웅왕, 길가메쉬.


“별 것 아니다. 지금은 일이 끝났으니 돌아가주지 않겠나.”

“짐이 먹고 싶으니 어서 대령해라.”

“…미안하지만 이미 요리사는 갔다. 먹고 싶으면 다른 곳에 가서 먹도록. 심심하면 에미야 저에 가지 않았던가.”

“그곳은 텅 비어있었다.”


뾰루퉁한 목소리다. 화가 나 있는 건가- 싶지만 그런 걸 알아차리게 할 정도로 그는 만만하지 않다. 어쩌면 삐져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면 다른 곳에서 먹지 그러나. 이 곳 말고 좋은 곳은 많이 있다.”

“시끄럽다, 페이커. 가서 먹을 거나 들고 와라. 듣기로는 네 놈의 요리솜씨도 괜찮다던데.”

“미안하지만, 함부로 요리를 할 수 없을뿐더러 지금은 할 처지도 못 된다.”


요리의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난다. 그래서 요리는 포기한 지 오래. 아무리 임신했다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몰래 산부인과에 가서,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인 양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심한 분은 한번 데려와 주십시오’ 라는 말에 침묵-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정을 도도하신 영웅왕께서 알아 주시려나.


“짐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인가?”

“…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음부턴 조금 일찍 오는 게 좋겠군.”

“페이커에게 쓸데없는 소리 듣고싶지 않다.”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나에게로 옮았다가 곧 앞으로 향한다. 저 눈동자는 루비 같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다, 루비는 너무 무기질적이다. 그게 가장 어울리긴 하지만. 역시 장미가 어울리려나. 살아 있고, 불꽃같이 타오르는 색깔로, 모두를 유혹한다. 만인지상(萬人之上)에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둘.


그가 몸을 일으킨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그맣게, 속으로만, 속삭여서 아이에게 말한다. 저 빛나는 사람이, 너의-



딸랑, 하는 풍경소리와 함께, 그가 나간다. 등을 돌리고 떠나가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우욱-”


이 추한 꼴을 보였을지도 모르니까.




후두둑- 바닥이 조금씩 젖는다. 아쳐는 숨을 삼켰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것. 말할 수 있을 리가-



내가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다. 어머니도 될 수밖에 없다. 무엇을 바랐던가, 그에게. 내가, 무엇을-



바라지 않는다.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아니까. 기대하지 않는다. 헛된 꿈은 차라리 망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의미없는 것이니까. 이런 거짓된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 스스로를,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 이 아이도 거짓이고, 나도 거짓이다. 어차피 세계에 묶인 몸뚱아리다. 이 아이 또한 세계가 ‘명령한’ 아이가 아닌가.


그런데도,


망막에 맺힌 그의 상이 떠나질 않아서. 그 비오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너무나 뚜렷해서. 뱃속의 마력과 내 눈 앞에 있었던 그의 마력이 똑 같은 파장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어서.


또다시 헛되게,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