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람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中
푸드드득, 날갯짓에 하얀 깃털들이 주위에 흩날렸다. 아쳐는 신기해하며 깃털을 잡으려는 이리야의 손을 잡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조금 더웠다. 옷을 조금 두텁게 입었으려나, 대충 자신의 옷을 훑어보고는 반팔티에 롱스커트 차림인 이리야를 바라보았다. 통통 튀는 걸음으로 자신을 앞서 걷는 사랑스러운 누이. 아쳐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쳐, 몸이 좋지 않아 보여.”
“나쁜 편은 아니다.”
“힘들지는 않아?”
“괜찮다. 너는 어떤가, 이리야스필.”
“이리야라고 부르랬는데, 늘 시로는 그렇게 불러.”
“네 ‘시로’는 내가 아니지 않나. 네 주위엔 널 이리야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 이렇게 불러주는 사람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투덜대면서 이리야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아쳐는 웃으면서 근처 강변의 벤치로 다가가 이리야를 앉혔다.
“고맙다.”
“뭐가.”
“내 상태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말이다.”
“…말할 종류의 것은 아니었어.”
이리야는 고개를 푸욱 숙였다. 아쳐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웃었다. 그녀 앞에서 얼굴을 찌뿌릴 수는 없어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울 수가 없어서. 우는 법을 잊어버려서.
02 鳩 (비둘기) 羽根
먹을 것에 대해 예민해진 요즘은 식당 근처에 가는 것만도 고역이다. 먹을 것을 거의 입에 대지 못하고 있는데, 뱃속의 아이는 마력이 부족해서 그러는지 계속 배를 발끝으로 두드려댄다. 아니 손인지 발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가끔, 그런 느낌이 든다. 5개월이면 이런 것도 느껴지는구나. 묘한 느낌에 배를 어루만져본다. 그러다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타인에게 얼마나 어색한 것인지를 자각하고나서, 아쳐는 다시 허둥지둥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기묘했다. 그 이상으로 이 상황을 묘사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며, 아쳐는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았다. 햇볕은 여전히 따스했다. 꾸벅꾸벅, 잠이 늘어서일까. 아르바이트는 거의 그만둬 버려야했다. 그래도 첫 몇 달간 무작정 뛰었던 게 도움이 되어서인지, 자주 느껴지는 허기에 대비할 만큼의 음식비가 생겼다. 옆에 있던 바구니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물며, 아쳐는 노곤한 몸으로 중얼거렸다. 평화롭군,
평화로웠다.
길가메쉬의 기분은 그닥 좋지 못했다. 오늘따라 재수에 옴 붙었는지, 불운의 연속이었다. 멋지게 새 옷을 차려입고 세이버에게 가려는데, 아이스크림을 든 어린애와 부딪쳐 옷을 망쳐버렸다. 실체화를 잠시 풀면 될 테지만 그럼 새 옷도 같이 사라질 것은 당연지사. 결국 적당히 물에 빨아 놓긴 했는데 여전히 축축해서 또 기분이 나쁘다. 게다가 세이버는 만나지도 못했다. 식사는 이제는 냄새만으로도 맛을 파악할 수 있을, 끔찍한 마파두부. 신부 앞에서 마파두부가 담겨있던 그릇을 엎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와 버렸다. 그리고 길을 걷던 중 느껴지는 마력에 길가메쉬는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페이커로군. 기분도 좋지 않은데 보구라도 시전할까. 라는 생각으로 길가메쉬는 가던 방향을 꺾었다.
그런 의도였건만.
“… 무방비하군. 하, 죽을 결심을 한 건가.”
아쳐는 노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손에 들린 샌드위치가 바닥으로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옆의 바구니에는 뭔가 각양각색의 이름도 알 수 없는 빵들이 가득했는데, 향이 괜찮아서 그의 시선을 끌었다. 길가메쉬는 아무렇지 않게 빵을 하나 집어먹어보았다.
“…”
할 말이 없었다. 페이커의 솜씨는 솔직히 에미야저의 그 붉은머리 꼬마보다 월등하다. 거기다가 날씨 또한 적절히 좋았다. 젖은 옷도 보송히 마를 만큼. 슬금슬금 아쳐의 옆에 가 앉은 길가메쉬는 도시락통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물병 하나와 뭔가 먹을 것이 이것저것 많다. 어차피 점심도 못 먹어 배도 고픈데 잘 되었다 싶어,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빵을 시식하기 시작했다. 물결은 잔잔하고 저 날지도 못하는 닭의 무리- 길가메쉬는 잘 날지 못하는 닭둘기들을 비둘기라고 칭하지 않는다.- 들은 이쪽 근처에 얼씬하지 않으니 조용하다. 거기다 맛있는 빵이라. 만족스런 표정으로 길가메쉬는 빵을 하나 더 집어들었다. 그 때,
툭. 하고.
어깨에 무게가 실린다. 꾸벅거리던 고개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그 무게를 그대로 받아내는 것은 길가메쉬의 오른쪽 어깨였다. 무겁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인간과 닮았다고 해도, 그는 2/3이 신인 존재인 것이다. - 단지, 살핏 느껴지는 열기가 조금 높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
“…흠.”
일단 도시락을 훔쳐먹는 처지로서 막 밀어내기는 상당히 찔린지라, 길가메쉬는 왼손으로 빵 하나를 더 입에 던져 넣었다. 어깨를 빼버리고 싶지만 그럼 분명히 페이커는 잠이 깰거다. 그렇지만 자신은 이미 페이커의 도시락에 손을 대버렸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길가메쉬의 정신세계에서 그런 종류의 죄책감이 들어갈 구멍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 또한 세계의 지식을 받은 교양인(...)임을 명시하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보통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겉보기만 보고 그런 착각을 ‘마음 속으로’만 하는 것에 해당한다.
여튼, 사위는 조용했고 숨소리는 일정했다. 빵의 향기는 달콤했고 햇볕은 따뜻했다. 이 네 가지가 적절한 박자를 맞추어 가장 달콤한 수면제를 만들어냈다. 길가메쉬는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고개는 조금씩 오른쪽으로 꺾여, 아쳐와 겹쳐졌다.
이 달콤한 낮잠은, 몇 시간 뒤, 길가메쉬가 뒤척이며 바구니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잠이 깸으로써 끝맺어졌다. 자신도 페이커와 잤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길가메쉬는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결코 망가진 바구니에 대한 누군가의 분노를 보고싶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둔다.)
아쳐는 얼마 뒤 깨어나서, 대체 왜 자신의 점심바구니가 풀밭에 엎어져 있는지, 목이 꺾여서 잠들었을 텐데 왜 이렇게 편안한지, 그리고 왜 이렇게 마음이 차분해졌는지 알 도리가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구니를 챙길 따름이었다.
나머지 부스러기 하나마저 먹으면
올 때처럼 어디론가 사라지는
비둘기를 만날 수 있어요. 그 때에는,
눈으로 손으로 애원해도
다시 오지 않아요.
-김유선, 김광섭 시인에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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