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닛-fate관련/-[fate]애절함 30제(금궁)

16 紅い花 (붉은 꽃) 裸体

보랏빛구름 2008. 8. 22. 13:34

나는 모든 것을 짊어진 자였으되,

내가 선택했던 자는 짊어질 수 없었다.






영령이 된 후부터는 시간이 멎은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나는 그 일이 몇 백 년 전에, 혹은 몇 천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백 수천 수억의 시간에도 결코 쓸리지 않을 기억이 있다. 유일한 나의 친우였던 자, 엔키두Enkidu.


나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져, 나를 위해 살아갔던 자.


그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나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저주가 그의 몸을 휩싸고 돌 때에도 나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서 용맹스럽게 싸우다 죽는 것도 허락되지 않아, 그저 침상에 누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한 마디는― 나를 미치게 했다.



저를 잊으십시오, 길가메쉬.

저를 잊고, 당신의 행복을 누리십시오.


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내 유일한 친우였던 너다.

내 유일한 안식처였던 너다.

네가 없는 이 세상이, 행복을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더냐?



그러므로 나는, 너를 죽인 이 세상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16 紅い花 (붉은 꽃) 裸体







이 세상은 자신이 살았던 까마득한 과거의 우룩과 다르다. 굳이 건축물이나 옷차림을 언급하지 않아도 좋았다. 이 세상은 그 때와 달리, 추악하고 텅 비어있다. 죽어도 상관없을 인간들이 뻔뻔한 면상들을 보이며 길을 걷는 모습을 보자면, 정말로 ‘세계’ 그 자체를 찢어발기고 싶다는 욕망이 든다. 그러나 그것을 멈추는 이유는 단지, 이 세상이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땅을 기는 벌레처럼 비참하게, 그러나 확실히 살아남으려고 소리 없는 몸부림을 외치는 그 모습이, 하나의 유흥거리였기 때문에.


그랬었기 때문에.





그런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낯선 울림이 있다.




“페이커.”


현존하는 유일한 천적. 자신의 보구, 게이트 오브 바빌론Gate of babylon 과 필적하는 고유결계, 무한의 검제Unlimited Blade Works 를 시전하는 자. 첫인상은 최악. 감히 더러운 페이커 따위가 내 옆에 동등하게 설 수 있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페이커 따위, 인정할까보냐.










어느 날이었다. 하늘은 흐렸고 비가 올 것 같았다. 아침부터 꿀꿀한 날씨에 덩달아 내 기분도 별로 좋지 않았다. 발길 닿는대로 가다 보니 어느새 휴우키 대교에 와 있었다. 붉은 색 철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는 얼굴을 찌뿌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새파란 강물이 흘렀다.


오늘따라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에 에미야 저로 가서, 페이커의 얼굴을 보고 기분이 나빠진 게 그 이유라면 이유인걸까. 잘 하면 기사왕과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자 더 기분이 나빠져서, 길가메쉬는 손에 잡힌 난간을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찌그러뜨렸다.


기분 나쁘다.












페이커는 에미야 저에 있었다. 다시 돌아간 에미야 저에는 그 녀석밖에 없어, 길가메쉬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길가메쉬는 찌뿌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집안 청소를 할 뿐이었다. 흘끗, 자신에게 한 번 시선을 준 이후로는 잠시 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놓긴 했다. 아주 잠시였지만.


“점심때인데, 교회로 가지 않는군.”

“그 수녀 계집은 되도록 보고 싶지 않아. 네놈이야말로 짐이 왔는데 주안상도 차리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심기의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아쳐는 눈도 까딱 않고 받아쳤다.


“아아, 곧 차리도록 하지. 무엇을 좋아하나?”


그런 말을 하더니 곧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핏, 하고 비웃음이 새어나왔다.


“흠- 짐이 제대로 먹을 만한 것이 이 집 안에 있을 리 만무할 테다.”


녀석이 조금 안도한다.

표정이 저렇게 눈에 띄는 녀석이었나, 조금 의외.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녀석이 곧 걸레를 놓고 손을 씻더니 요리 준비를 한다. 뭔가 핀트에 맞지 않는 레이스 달린 흰 앞치마가 우스웠다. 비웃으며 녀석이 요리하는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각 사각, 뭔가 껍질을 벗기는 소리가 일정하다.

그러더니, 녀석이 잠시 뒤를 돌아봤다. 아무렇지 않은 동작으로 돌아보더니 잠시, 넋을 잃은 표정을 한다. 탁한 시야에 뭔가 싶었더니, 곧 얼굴을 찌뿌린다. 그리고 예민한 후각에 무언가가 잡힌다. 피냄새다.


녀석이 허둥지둥 도마 위에서 손을 내린다. 피가 제법 많이 나온다. 저 정도면 적어도 몇 센티즘 칼날이 박힌 거다. 멍하니 도마만 바라보는 녀석이 한심해서 일어섰다. 녀석은 그제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손등을 핥으려고 하고 있었다.


“멍청하군. 무슨 꼴이냐.”

“그게, 실수다.”


녀석이 고개를 들어 눈동자를 맞추더니, 머뭇거리면서 뒤로 조금 물러섰다. 여전히 피는 철철 흐른다. 이대로 가만있을 셈인가, 이 녀석. 적당히 눈에 보이는 걸 들어보니 행주다. 죽죽 길게 찢어서 손에 꽉 매어주었다.


“다 된 건가. 그럼 요리나 계속해라.”

“아아… 고맙다.”

“고마워 할 것 까지는 없다. 그저 치료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멍청이에게 자비를 베푼 것 뿐이니.”


아쳐는 조금 희미하게, 하지만 뚜렷이 웃으며 말했다.


“금방 요리는 끝날거다. 거기서 기다려라.”

“아아.”


대답하고 뒤돌아섰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다시 녀석을 본다. 검은 셔츠에 바지는 녀석이 가장 자주 입는 옷이지만, 문득 붉은 성해포를 입은 개념무장의 모습이 그 위에 투영된다. 그래, 그 피처럼 붉은 옷을 입고 간장막야를 들고…


쯧- 혀를 차며, 길가메쉬는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페이커 따위가 사람 참 성가시게 하는군. 뜰에는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이름따위 알 게 뭐람. 세계가 주입한 지식에 따르면 백일홍이라는 꽃이다. 이상한 이름이군- 이라고 생각했다. 시선이 그 꽃으로 계속 간다. 머릿속으로는 작은 의문을 떠올리면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언만,

백일을 피는 꽃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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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 깔고 싶었습니다...OTL

 

그치만 복선은 안된 것 같아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