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부터 얽히기 시작한 신무영과의 관계는 희연이 생각하기에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희연이 사인을 마치자마자 무영은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희연은 그제서야 계약서를 한 자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계약서는 제 손을 떠난 상태였다. 이전 상사라면야 다시 돌려받을 수도 있을 텐데, 이번 계약서는 절대 뺏기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 가 있다. 희연의 복잡한 표정을 보며, 무영이 말했다.
"계약은 내일부터야. 나머진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오늘은 들어가도 좋아."
"..... 그래."
윤이 재빨리 희연의 말을 받았다. 같이 가. 희연에게 걸어가려는 윤의 몸이 크게 휘청이다 멈춰섰다. 무영의 그의 왼쪽 팔을 붙들고 있었다. 곧 새하가 다른 한 쪽 팔을 잡아챘다.
"넌 안 돼."
"니놈아는 여서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
윤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왼팔에 힘을 주었지만 무영의 악력은 윤의 생각보다 엄청난 편이어서, 손목은 도통 빠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윤이 고개를 들었다. 희연이 눈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이 몸띠로 용캐 걸어댕깄을지 몰라도,"
"협박이라면 지겹도록 들었어, 놔."
"니 참말로 죽고잡나? 내가 그래도 의산데 설마 다 죽어가는 꼬라지 하나 못 알아보것나!"
"....."
새하의 말을 들은 희연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희연에게 말했다. 나 괜찮은데, 진짜야..... 희연은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넌 여기 있는 게 좋겠어."
희연의 굳은 표정을 보며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과 새하가 잡고 있던 윤의 팔을 놓았다.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무영에게서 팔을 빼려고 발버둥치느라 힘이 세게 들어갔을 법도 한데 윤의 팔에는 손자국 하나 없어서, 새하는 속으로 감탄했다.
"내일 봐."
"...."
윤은 복잡한 심정으로 희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희연이까지 말려들 일이었다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끊어 냈어야 했는데. 괜스레 저 때문에 희연이 말려든 건가 싶어 염려가 앞섰다.
사실 윤도 자신이 어떻게 무영의 집에 오게 되었는지 모른다. 몸 상태가 나빠 휴식이나 취할 겸 잠시 공원에 앉아 있었고, 깜빡 잠이 든 것도 같은데 갑작스레 미친 듯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가 싶어 눈을 떴더니 이미 낯선 집 안이었다. 그리고 신무영이, 제 옆에 꼭 쌍둥이같이 닮은 사람을 데리고 눈 앞에 있었다. 납치당했나, 라는 생각이 들어 잽싸게 일어났지만 그 순간 신무영을 닮은 빛바랜 금발머리의 남자가 윤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 악력에 윤은 그대로 꼼짝없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윤이 고개를 들어 무영을 바라보았다. 무영은 별 일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받았다.
"납치는 범죄인데."
"뭘 새삼스럽게."
딱히 자신에게 그 이상의 해를 가하려는 뜻이 없어 보였으므로 윤은 얌전히 앉았다. 힘이 빠진 것을 느꼈는지 남자도 금방 윤의 몸에서 손을 떼곤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손을 들었다. 곧 방으로 낯선 사람이 하나 더 들어왔다. 특이하게도 한복을 입고 있었고, 말투도 이 곳 사람같지는 않았다.
"야는 누꼬?"
"면역자. 몸 상태 좀 검사해 보라고 불렀어."
"몸이 많이 나쁘나?"
"보고 있어. 난 손님 맞으러 갔다 올 테니."
그 말과 함께 무영과 그 닮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윤은 제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윤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는 온몸을 만지작거렸다. 제 몸을 만지는 손은 섬세하고 따뜻해서, 윤은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니 머리는 누가 쥐 파뭇나?"
"수술 때문에...?"
"허어..... 몸은 또 와 이렇노?"
"검사한다고"
윤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를 의사 같은 사람에게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안구를, 혹은 피부를, 폐를, 간을, 뇌를 떼어간 이들은 이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연구원들의 목소리는 소름끼치게 기계적이었다. 오늘은 눈을 뽑아 보자, 오늘은 폐를 잘라 보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때부터, 그 목소리들이 무서웠다. 목소리들은 어둠처럼 자신을 좀먹으려 들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은 꽤나 이상했다. 윤은 아주 예전에, 자신에게 케이크의 맛을 알려 준 그 연구원이 떠올랐다. 어렴풋한 기억 속의 그녀는 늘 웃고 있었다. 윤은 이 남자도 웃을까 싶어 슬그머니 눈을 위로 치떴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남자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 신무영이를 좀 봐야 쓰것다, 니 몸은 와 이꼴이고! 몸띠가 이꼴이 될 동안 뭐하고 있었노?!"
대뜸 버럭 소리를 지르던 남자는 안 된다,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더니 저를 붙들고 집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이 때까지만 해도 윤은 무영이 희연이와 함께 있을 줄 몰랐었다. 무영의 집에 계속 남아있게 될 줄은 더더욱이나.
윤은 이제서야 이름을 알게 된 새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난 인질인 건가?"
"뭔 헛소리고. 닌 환자제."
"......."
윤은 눈을 깜빡였다. 정말로, 이상한 곳이다.
****
다음 날이 되자,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한다는 무영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밤새 계약 걱정에 잠 못 이루다 새벽녘에야 어렴풋이 잠들었던 희연은 이상한 감각에 버릇처럼 옆에 있던 이불을 한 움쿰 끌어안았다. 피곤한 머리가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더 평화로운 시간을 즐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슬슬 일어날 시간이다."
머리에 찬물이 쏟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희연은 잠이 순식간에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어질한 시야에도 낯선 벽과, 보고 싶지 않던 인간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깜빡이니 시야는 훨씬 선명해졌다. 이불의 촉감은 자신이 익숙하게 덮었던 그것인데, 방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는 신무영이 익숙한 슈트 차림으로 서 있었다.
"잠옷 취향은 생각보다 귀여운 편이었군."
하늘색 하트가 그러진 잠옷은 윤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이었다. 희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잽싸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익숙한 무기를 투영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잠에서 깨지 못한 듯 잔뜩 잠겨 있었다.
"어떻게.... 내가 왜 여기에 있어?"
"일 하라고 데려왔지. 계약대로 했을 뿐이야. 불만 있으면 계약 조항대로 5조 2억 4천만원 보상하던가."
"뭐, 뭐...."
"여기서 뭐해?"
할말을 잃어버린 희연의 앞에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금발에 적안이었지만 무영이와 쌍둥이인 듯 꼭 닮아서, 희연이 눈을 깜빡거렸다. 잘못 본 게 아니라, 머리와 눈 색깔을 빼고는 신무영을 꼭 닮은 남자였다.
"아, 면역자 꼬맹이네. 쟤가 여긴 왜?"
"이그나지오냐.... 너한테 맡기긴 불안하지만.... 넌 희연이 집 안내 좀 해 줘."
"알았어, 그 정도야 뭐."
"괜한 애 괴롭히지 말고."
'이그나지오'라고 불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희연에게로 다가갔다. 희연이 멈칫멈칫 뒤로 물러섰다. 무영이 방을 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 이그나지오는 잽싸게 희연에게 다가가더니 손에 들린 무기를 빼앗았다. 그러곤 환한 웃음과 함께, 순수한 '악력'으로 무기를 가볍게 두동강냈다. 뚝 하고 부러지는 무기를 바라보며 희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 위험한 물건은 방 구경할 땐 필요 없잖아?"
두동강난 무기가 방바닥에 박혔다. 희연이 잔뜩 긴장한 눈으로 이그나지오를 바라보며 좀 더 뒷걸음질쳤다. 이그나지오는 별 일 아니랄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희연의 손목을 붙들었다. 흠칫 하고 희연이 크게 움직이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가 말했다.
"일단 널 매우매우매우매우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와 있어서, 그 사람들부터 소개시켜 줄게. 너희는 탈이라고만 불렀지? 이름 알려줄 테니까."
"아니 별로 알고싶지 않-"
이그나지오가 발랄하게 희연을 잡아당겼다. 버티려고 몸에 힘을 줬던 희연은 생각보다 강한 악력에 그대로 끌려갔다. '이, 이거 안 놔!?' 발버둥쳤지만 도저히 힘이 통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몸에 한 번 더 힘을 주려던 희연은 붙들린 제 팔을 보고서야 아직까지 잠옷도 채 갈아입지 않은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정신이 워낙에 없긴 했지만, 이 꼴로 누군가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가지 않는 힘을 억지로 줘가며 몸을 뒤로 뒤틀려는데, 몸이 갑자기 한 방향으로 확 꺾이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오, 벌써 다 왔네. 자, 자기소개 타임이야! 이쪽은 희연이라고 하는 면역자! 자, 탈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지?!"
짜잔~ 하는 소리와 함께 이그나지오가 방 안을 가리켰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제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그나지오는 가볍게 희연을 밀어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희연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딱 하나만을 생각했다.
'X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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