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연은 면역자였다. 국가에 소속되어 있었고, 감염자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었다. 미 등록된 감염자들을 추출하는 일도 했는데,희연에 따르면 면역자에게는 '그 나름의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그 모든 일 가운데에서 가장 골치아픈 것은 감염자를 처리할 때 '탈'이나 '신무영'과 엮이는 것이었다. 신무영은 제 윗선에서도 차마 건들지 못하는 인물인데 사사건건 감염자 일에 관여하는 것 같아 불쾌했고, 탈들은 희연이 처리해야 하는 감염자를 데리고 사라져 희연의 분노를 몇 배로 증폭시켰다. 그나마 신무영은 '뭔가가 있다'라는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는 인물이라 짜증나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연관될 일은 없었는데, 탈들은 감염자 처리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어 몇 번이고 싸웠던 기억이 있다.
그 탈들이 제 눈앞에 있다. 희연의 싸한 표정과는 달리, 가까이서 본 그들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아니, 신기한 것을 본 것마냥 명랑했다. 방에 있던 탈은 모두 넷이었다.
".... 정말 닮았는걸...."
"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로군, 반갑네!"
"술내 쩌는 얼굴로 애한테 다가오지 마 좀. 아, 네가 그 유명한 면역자구나?"
네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서 한 마디씩 내뱉었을 뿐인데도 희연은 정신이 없었다. 그들 중 중 같은 옷차림을 한 술냄새 쩌는 남자가 희연에게 가까이 다가왔으나 그를 멀리 걷어차며 키가 큰 검은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너, 이름이 뭐지?"
키가 너무 커서 가까이 다가왔을 뿐인데도 위압감이 들었다. 희연은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얼굴을 찌뿌렸다. 화가 난 것처럼 표정이 없는 남자는 희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네 이름은 뭔데?"
사실 말을 놓은 건 상대방이 먼저 말을 놓았기 때문이다. 남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무슨 일이 터질까 싶었는지 옆에 있던 분홍머리의 아가씨가 잽싸게 나섰다. 굉장히 예쁘장한 얼굴이어서 희연도 키 큰 남자로부터 시선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아라라고 해요! 각시탈을 썼고요, 제 옆에 키 크신 분은 초이라고, 초랭이탈이세요!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네요!"
"난 중탈이지, 가선이라고 하네. 우린 자주 뵈었지?"
"난 할미탈이야. 하나린이라고 하지.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본 적 있기는 해? 일방적으로 봤겠지."
"아이 참, 그런 이야기 할 때가 아니잖아요?"
우르르 자기소개의 시간을 갖자 희연은 괜히 이름을 알려주지 않겠다고 치댄 게 부끄러워졌다. 생각보다 평범한 사람들이네, 라는 생각으로 희연이 입을 열었다.
"나는 희연이라고 하.... 어?"
쑥스럽게 말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바닥이 물컹해졌다. 희연이 놀라 바닥을 바라보니, 이상한 늪 같은 게 제 발끝부터 잡아먹어가고 있었다. 곧 검은 채찍 같은 게 늪에서 튀어나와 제 허벅지와 어깨를 감쌌다. 떼어내려고 발버둥치는 희연을 바라보며 아라라는 이름의 탈이 중얼거렸다.
"어머, 무영님이 부르시네요."
그 목소리를 끝으로 희연은 그 늪에 완전히 묻혔다. 잠시 어지러워 멀미가 나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제 눈앞에 무영이 있었다. 희연이 핑 도는 머리를 진정시키려고 눈을 감았다 떴다. 무영과 희연이 있는 방은 희연이 한 번도 오지 못한 곳이었고, 무영의 옆에는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머리에 혹을 하나 달고 서 있었다. 이그나지오라고 했던 것 같다. 희연이 어지러움을 떨쳐내고 똑바로 섰다. 그제서야, 뭔가 정신이 들었다.
"..... ?"
"좀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많이 놀랐나?"
"너... 어떻게...?"
"아, 용마를 소개시켜주지 않았군. 쉐도우, 나와 봐."
무영이 발을 톡톡 두드렸다.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그 속에서 온통 검은 피부의 갑각류 같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아니, 갑각류가 아니라 갑각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사람 같았다. 희연의 표정이 이보다 더 놀랄 순 없을 만큼 커졌다.
"내 용마야. 쉐도우라고 하지. 특기는.... 네가 한번 당해본 것처럼 여기저기 이동하는 거."
"너, 너, 설마 오늘 나도,"
"맞아. 혹시 도망칠까 쉐도우더러 곱게 모셔 오라고 했는데, 설마 자고 있었을 줄이야. 실수였어."
"이건 납치잖아! 범죄라고! 너 네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거 참 시끄럽네. 뭐 어때. 니가 지금 불만 있다고 투덜거릴 처지였어?"
옆에 있던 남자가 빈정거렸다. 무영이 그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악, 야 진짜 아파! 다시 빽빽거리는 남자를 뒤에 두고 희연에게 다가온 무영이 천천히 말했다.
"뭐 일단 놀래킨 점에 대해선 사과하지. 저 녀석의 행동에 대해서도.... 난 분명히 집안 구경을 시켜주라고 했는데 왜 탈들에게 널 데려간건지 모르겠어. 많이 놀랐나?"
"별로...."
오늘 만난 탈들은 생각보다 평범한 이미지였으므로 희연은 고개를 저었다. 말을 오래 하진 못했지만 이전에 만났을 때처럼 오히려 빨리 마주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차, 하듯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윤은?"
"그 녀석은 지금 새하가 돌보고 있을 텐데, 어제 왕의 수족한테 물어 봤는데 왕은 한동안 보기 어렵다고 해서 말야... 일단 그쪽으로 가봐야 할테니... 이그나지오, 너 말고 호 불러. 호한테 시켜야겠어."
"평범한 장난이었는데."
투덜거리던 남자는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동시에 눈동자 색이 바뀌었다. 붉은 빛이던 눈동자가 금새 연두 섞인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희연이 눈을 깜빡였다. 잘못 봤나 싶었지만 눈동자 색이 확실히 바뀌어 있었고,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표정도 약간 다른 것 같았다. 호라는 남자가 무영에게 물었다.
"새하한테 가면 돼?"
"아마도. 일단 눈으로 봐야 이해할 수 있을테니까."
"랑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넌 이쪽으로 와. 집이 커서 구조가 좀 복잡하니까 천천히 갈게."
호가 앞장 서 방문을 열었다. 희연은 무영을 힐끔 보고는 호라는 남자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남자는 앞의 성격만큼 장난끼가 있어 보이진 않아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호라는 남자는 이중인격인가...? 쌍둥이에 이중인격이라니, 신무영 이 녀석 이상한 건 가정사부터였나'
옆에서 본 호의 얼굴은 가만히 있을 땐 정말 신무영과 닮아 있었다. 희연은 멍하니 그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희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호가 희연을 보더니 방긋 웃어주었다. 그 웃음에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 같아 희연은 조심스레 걸음 속도를 늦추어 호의 뒤에 섰다. 무영과 똑같은 얼굴이어서인지 어색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거 같기도 했다.
"사실 널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좀 감사하고 있어. 네 덕분에 랑이가 정신을 좀 차렸거든."
희연이 얼굴을 찌뿌렸다. 호가 하는 이야기는 무영이나 탈의 이야기보다 훨씬 애매하고 알기 어려웠다. 아마 이해시킬 생각이 없는 혼잣말 같은 것이리라고 희연이 막연히 넘겨짚었다. 실제로 호는 희연을 보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네 친구도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 근데 의사양반 표정이 영 나빠서, 잘 모르겠네..."
호가 어느 문 앞에서 멈춰서더니 똑똑 문을 두드렸다. 누고, 하는 소리에 호야- 라고 답한 남자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거실에는 윤이 앉아 있어, 호는 조금 안심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깜빡였다.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걸까 싶었던 모습이 현실이었다.
"아, 니가. 뭔일이고?"
"인질님 몸 확인하러~ 아, 좀 놀란 것 같은데."
윤의 몸에는 빼곡하게 침 같은 게 꽂혀 있었다. 윤이 희연을 바라보면서 안녕~ 하고 인사했다. 낯빛이 좋아 보이긴 했지만, 드는 손에도 가득 꽂혀 있는 침에 희연이 다급히 윤에게 다가갔다.
"너 꼴이 왜 이래? 고슴도치야?"
옆에 있던 새하가 말을 받았다. 앞에는 침이랑 약 같은 게 가득 쌓여 있었고, 빈 약그릇 같은 것도 눈에 띄었다. 희연이 눈을 도로록 굴렸다.
"아 몸이 영 안 좋아가 일단 응급처치라고 꽂아논기다. 약침이니 너무 걱정 말그라."
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당사자인 윤이 말이 없었으니 뭐라 덧붙일 말이 없었다. 윤은 그런 희연의 속을 알아챘는지 불퉁한 희연의 뺨을 침 안 꽂힌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잘 잤어?"
"어... 응...."
그제서야 희연은 다시 한 번 더 제 옷차림을 깨달았다. 이 옷, 분명 윤한텐 버렸다고 말했지.... 희연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이쯤되니 뻔뻔해져야 할지 부끄러워야 할지 도망쳐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은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호가 윤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왜 침을 저렇게 마루타마냥 빼곡히 꽂아놓은거야?
"벨 수 없다. 쟈는 온몸이 고장나가 한두방 꽂아서는 먹히도 않것드라고."
윤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제는 꽤 잤어. 여섯 시간 정도 잤나?"
"몸은 괜찮고?"
"꽤 좋아. 보통 의사는 모르는데, 저 사람은 잘 알더라고. 의사일 오래 했다던데."
"그래...?"
희연의 미심쩍은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새하는 허허 웃으면서 희연과 윤을 바라보았다. 몇백년을 살아온 새하의 입장에서 윤과 희연은 아직 너무 어렸다. 하지만 제대로 살펴본 윤의 몸은 빈말로도 낫는다 하기 어려운 상처들 뿐이었다. 안팎으로 잔뜩 상한 몸뚱아리는 소금인형처럼 가련하고 연약했다.
"니가 이 꼴잉게 쟈가 저 난리를 치는 거 아이겠나. 퍼뜩 낫고로 약 잘 챙기 무라. 그래도 누구처럼 약 안 가리가 좋네"
"? 누구 또 약 먹는 사람이 있어?"
"신무영이도 아가 영 몸이 안 좋아가 내가 약을 가끔 준다."
"그러고 보니 의사양반 빨리 약 줘. 아침약 아직 안 줬어."
"만들어는 놨다, 니가 갖다주든가. 하도 안 물라꼬 난리를 직이가 내는 갖다주기 실타."
말을 듣던 희연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탄산처럼 청량감있는 웃음이 방안에 가득 들어찼다.
"푸핳, 하하하하하하, 그게 뭐야, 애야? 아 진짜 웃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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