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과의 대화가 끝난 후, 호는 희연에게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 설명해 주었다. 타이틀이야 무영의 경호원이었지만 무영은 딱히 그런 거 없이도 잘 지내니 굳이 경호를 시키진 않을 것이라고, 잡다하게 무영이 일을 시킬테니 그런 거나 좀 받아서 해 주면 된다고 했다. 혹시 무영이 시킬 일이 없다고 말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했다. 희연이 가만히 듣고 있다 되물었다.
"출근이랑 퇴근 시간은 언젠데?"
"어..... 그런게 있어야 해?"
"언제 자라고??"
"어차피 이 집에 있을건데 그냥 방문 밖에서 부르면 안 돼?"
"???????? 내가 왜?????????"
"아 잠깐만...."
호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바닥을 쳐다보았다. 바닥이 울렁이더니 아까 무영이 보여준 것과 비슷한 그림자가 일렁이며 동그란 불빛같은 눈동자가 깜빡였다. 랑이한테 좀 물어보고 와봐. 그림자는 금방 사라졌다가 금방 다시 돌아왔다. 그림자와 하마께 바닥에서 튀어나온 종이뭉치가 하늘거렸다. 호는 그 종이를 받아다 희연에게 내밀었다.
"어차피 오늘 랑이는 바빠, 이거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음 되겠다."
희연이 종이뭉치를 받았다. 종이 맨 앞장에는 제 사인이 되어 있었다. 희연은 이게 제가 사인한 계약서구나 싶어 종이를 빠안히 바라보았다. 윤이 흥미롭다는 듯이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호가 방을 나가고 나서, 새하가 넌지시 희연에게 말을 건넸다.
"읽기 전에 말해두는데 정신 똑띠 차리라, 아마 니가 빠져나갈 구멍은 읎다."
"무슨 소리야?"
"니가 먼 정신으로 그따가 싸인했는지는 몰라도, 그거는 합법적 노예계약서라."
"....?"
희연이 천천히 계약서 사본을 읽어보았다. 윤은 느긋한 표정으로 희연의 표정이 차례로 빨개졌다 파래졌다 하얘지는 모습을 신나게 구경했다. '그' 신무영이 한 일이다. 덫에 걸린 이상, 충실히 움직여줄 수밖에 없겠지. 제 직장이 없어지며 제 미래도 함께 없어진 것마냥 굴던 이는 이제야 자리를 잡았다. 그제야 윤은 자신이 왜 희연을 말리지 않았는지 납득했다. 제 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정감이 생기는지 윤은 알고 있었다. 아마 희연은 아직 이해하지 못할 부분일 것이다.
희연은 계약서를 다 읽고 나서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이 새x 미친 거 아냐.... 따위의 말이 벌어진 입 사이로 흘러나왔지만 그뿐이었다. 윤은 희연의 절망을 모르쇠로 일관한 채 제 몸에서 침을 뺀 뒤 흉터에 약을 얹는 새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거!! 절대!!!!! 인정못해!!!!"
한참을 땅을 파던 희연이 벌떡 일어섰다. 순간 깜짝 놀란 새하가 헛손질을 했고 윤의 몸이 굳었다. 그들의 반응이야 어떻든 희연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도도도 달려나갔다. 싸우자, 신무영!!!!! 씩씩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새하가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손에 옮겨 쥐며 중얼거렸다.
"아가 참말로 팔팔하구마...."
희연은 문밖을 나서자마자 방금 전 무영이 있던 방으로 다급히 돌아갔지만 그 방에는 이미 무영이 없었다. 신경질이 난 희연이 온 집안의 문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어쨌건 어딘가에 있겠지. 집 밖으로 나갔을 거라는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한 채, 희연은 방 문을 벌컥벌컥 열었다. 그러다니 방금 전 탈들이 모여있던 방의 방문도 다시 열어버렸다.
"헉,"
"어머나, 희연님이 돌아왔사와요!"
"... 아, 죄송합..."
희연이 문을 닫으려 할 때, 갑자기 턱 하고 움직임이 막혔다. 희연이 당황하며 조심스레 문 옆을 바라보았다. 그 키 큰 남자, 이름이 아마도 초이라던, 그 남자가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너"
희연이 잠시 긴장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으니 무례함에 화가 났나 싶어 다시 한 번 사과하려고 입을 여는데 초이가 한 발 빨리 입을 열었다.
"밥 먹으러 가자."
"죄소, 네?"
"점심시간이니까."
초이가 문밖으로 걸어나오며 희연의 팔을 붙들었다. 초이의 악력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어서, 희연은 속절없이 초이에게 붙들려 끌려갔다. 저, 배 안 고파요! 들은체도 않는 초이 대신 등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탈 셋에게 도움을 외쳐봤지만 가차없이 무시당했다. 셋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느라 바쁜 것 같았다. 아마 희연이 그 때 조금만 정신이 있었다면, 셋의 대화는 '뭘 먹을까요?''아라가 좋아하는 걸로♥''허허허술한잔곁들여컼''꺼져 변태, 너 먹일 밥은 없다' 따위의 의미없는 사담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선 대화의 결론대로, 한 명은 강제로 퇴출당해 희연과 함께 식사를 할 사람은 셋으로 줄어들었다.
희연이 억지로 도착한 곳은 꽤 유명한 식당이었다. 유명한 만큼 비싼 값을 하는 곳이었는데다가 메뉴도 많아 고르는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셋은 앉자마자 희연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요리를 시켰다. 희연은 눈치껏 저들이 사주려나보다, 싶은 생각으로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테이블보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빼곡히 나오는 요리에 희연의 얼굴이 조금 창백하게 바뀌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이렇게 많이 먹지? 싶었는데 제 정수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먹어."
"어........."
차마 많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희연이 조심스레 젓가락을 들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수육을 한 입 먹었을 뿐인데, 갑자기 주위에 있는 접시가 달그락거리면서 바삐 움직인다. 순식간에 희연의 근처에 요리가 그득 쌓였다.
"원하는 만큼 먹어, 이 언니 골드카드 있다!"
"혹시 메뉴가 부족하신가요!"
"더 시켜도 되니까."
저... 이렇게 많이 못 먹는데요.... 차마 이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셋의 반짝반짝 기대 섞인 눈동자에 희연은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접시에 젓가락을 댔다. 사실 요리는 뭐든 맛있었다. 희연도 맛만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 요리가 제 위장에 넘칠 정도로 많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희연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잔뜩 먹었고, 결국 화장실에서 한 번 토하고 나서야 제대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윤은 거실에서 희연을 인도(?)받아 제 방으로 데려왔다. 윤이 한참 등을 두드려주고 손을 따주고 배를 만져주고 나서야 희연은 겨우 숨을 들이쉬며 중얼거렸다.
"왜 다들 내가 많이 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거야 모르지."
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희연의 배는 아직도 산더미처럼 부른 채였다. 내일 아침까지는 먹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 배불러... 죽을 것 같아..."
축 늘어진 희연을 보며 윤은 문득 희연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는 이런 모습은 상상도 못 했더랬지. 쿡쿡 웃는 윤을 보며 희연이 눈을 흘겼다. 그래, 이런 느낌은 그 때로선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는, 칼날처럼 예민한 시기였다. 희연도, 윤도.
희연을 처음 봤을 때, 윤은 희연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수많은 면역자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실력과 독기를 갖고 있던 아이는, 세상에 온통 죄인밖에 없다는 듯이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유독 예쁘장해 시선을 잡아채던 아이였다.
보통 면역자로 등록되어 시설에 들어온 아이들의 패턴은 비슷했다.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떼를 쓰거나,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며칠간 진이 빠질 정도로 난리를 치다가, 능력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면서는 조금씩 오만해진다. 오만함이 점차 커져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방져진다.
제 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굴던 아이들이 잠잠해질 때가 있다. 최초로 감염자를 처리할 나갈 때에는 꼭 한 명씩은 감염자에 의한 사망 사건이 발생하곤 했다. 제 실력에 심취한 아이 중, 방심하거나 혹은 가이드라인을 까먹거나 한 아이들이었다. 국가에선 책임이 없었고, "죽음"을 체험한 아이들은 점차 삶에 찌들어, 면역자를 관리하는 쓰레기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희연은 달랐다.그 가득 품은 독기가 무엇이 대상이었는지, 울고불고 난리가 난 아이들 사이에서 유달리 소년은 표정이 없었다.윤은 그 무표정에서 절망과 분노를 읽었다. 소년은 가득 부푼 풍선처럼, 속에 무언가를 가득 담아놓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윤은 자그마한 궁금증이 생겼지만 곧 묻어버렸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기엔 꽤나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그 무관심이 흥미섞인 관심으로 바뀐 것은 그 대의 면역자들이 단체로 실습을 나갔을 때였다.
처음 감염자를 본 면역자들은 잔뜩 겁을 먹고 도망친다. 혹은 제 힘에 들떠 매뉴얼이고 자시고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천둥벌거숭이마냥 날뛴다. 희연은 그러지 않았다. 완벽하게 짜인 대로 제 일에 집중하고, 감염자를 처리한 뒤 덤덤하게 다음 장소로 달려갔다. 탈들의 방해로 꽤 많은 감염자를 놓쳤지만, 희연의 행동은 어설펐지만 잔뜩 연습한 티가 났다. 일이 모두 끝나고 난 뒤 윤은 투덜거리는 몇몇 관리자 사이로 희연을 볼 수 있었다. 희연은 여서일곱쯤 되는 다른 면역자들과 큰 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다른 면역자들이 뭐라 했을지는 뻔하다. '건방지다'던지 '나대지 말라' 던지 그런 거겠지. 윤은 천천히 희연의 뒤에 가서 섰다.
"시끄럽나 했더니... 떠드는 건 거기까지 해."
"뭐, 너 뭐야?"
희연이 홱 뒤돌아섰다. 윤이 두 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지만 희연은 여전히 잔뜩 독기어린 눈으로 윤을 노려보았다. 그 와중에 다른 면역자들은 윤을 알아본 건지 슬금슬금 저를 피해 사라졌다. 좋던 싫던 윤의 면역자로서 능력은 꽤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윤이 희연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초콜렛 좋아해?"
윤은 그 때를 회상한다. 그 때에는 희연을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굽히느니 부러져버리겠다던 아이는 어느새 곧게곧게 자랐다. 시간이 어느만큼 흐른 미래에는 자신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지금은 누가 누군가를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
희연의 속을 터질 만큼 부풀어 오르게 하던 무거운 짐도 없다.
윤은 희연이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보곤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간다. 윤은 희연의 계약사항에 대해서는 내일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돌아오는 희연의 손에는 계약서가 없어, 아마 어딘가에서 잃어버렸겠거니 짐작한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사람 혼을 빼내려 드니까. 어차피 신무영은 박한 사람이 아니고 계약서 사본 따위야 얼마든지 줄 수 있는 인간이다. 생각보다 무영은 윤과 희연을 배려하고 있었다.
안도감에 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가벼움.
이곳은 어찌나 달콤하고 안온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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