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다.
꿈이라고 해도 좋다.
무영이 눈을 깜빡였다. 낯선 곳이다. 나뭇잎새로 비치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손을 들어 그림자를 만들었다. 좀 더 쉬고 싶은데, 든 손을 누군가 붙들었다. 무영이 눈을 깜빡였다. 시선 안에 금안과 은발이 들어찼다.
"너....?"
"뭐냐, 왜 그런 표정이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곁에 선 이는 은율이었다. 무영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율의 표정이 처음에는 띠꺼웠다가, 시간이 길어지자 어색하게 바뀌었다.
"내 얼굴에 뭐 묻은 것도 아니고, 뭐하냐"
"아니...."
무영은 차분하게 기억을 되살렸다. 마더, 그래, 마더를 죽이러 갔었다. 자윤과 누군가가 싸우는 모습을 보던 중, '마더'에게 팔을 붙들린 것 같은데, 그 때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싸우던 곳은 흙과 먼지가 날리던 지하였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무영이 제 뺨을 꼬집어 보았으나 아프기만 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은율이 무영의 뒤통수에 자비없는 손바닥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영이 제 뒤통수를 잡고 뒹굴었다. 하지만 제 병신같은 꼴을 보고는 억울해도 입을 다물 수 밖엔 없었다.
"너 때문에 길도 잃어 억울한데 떨어지면서 머리라도 박았냐, 왜 그 꼴이야?"
"떨어져?"
"새하 찾겠답시고 나대다가 저쪽 벼랑에서 굴러떨어졌잖아. 용마도 하필 새하 찾으랍시고 보내놔서 없었고... "
아, 새하를 찾으러 왔었다. 유진의 눈 상태가 나빠져서 그걸 확인할 의사를 찾아야 했다. 그 때 추천받은 게 '선비탈' 새하였다. 선비는 산을 주요 근거지로 활동한다기에 찾으러 왔었다. 무영이 얼굴을 찌뿌리며 몸을 일으켰다. 꿈이었나, 그 모든 게? 무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재수없는 꿈이었어.
이토록 꿈이기를 바라는 기억이 있다.
날은 아직 중천이었다. 무영은 미묘한 기분을 담아 은율의 뒤통수를 콩 하고 쳤다.
"뭐냐, 징그럽게!"
"여긴 새하가 없는 것 같으니 내려간다. 점심 먹을 시간이군."
지갑을 꺼내들자 은율은 얌전히 무영의 뒤를 따랐다. "뭐 먹을거냐?" 그 질문에 무영은 조용히 웃으며 은율이 좋아할 만한 답을 내놓았다.
"경상도는 소고기가 맛있다지."
소고기 10인분을 그 자리에서 고이 제 뱃속에 모시는 은율에게 무영은 경악보다는 놀람을 느꼈다.. 대체 저 몸뚱아리 어디에 그 정도의 음식이 들어가는지 무영으로선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잘 먹으니 좋은 거겠지.
잘 먹는 모습은 늘 보는 모습인데도 낯설고 멀게 느껴져, 무영은 계산을 하겠다고 벌떡 일어섰다. '아! 나 어머으수이어!' 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로 카드를 꺼내 긁고 있자니 다급하게 제 그릇을 비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익숙한소리마저도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꿈을 너무 오래 꾼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새 식사를 끝마쳤는지 은율이 어깨너머로 다가오며 느긋하게 말했다.
"야, 간식은 별개다"
순간 무영은 제 아련한 기억이고 자시고간에 본능대로 행동했고, 은율은 무영의 휴대폰과 진하게 입맞춰야만 했다. 얼굴에 휴대폰을 고스란히 받은 은율이 화를 내면서 다툴 '뻔'했으나 현명했던 가게 주인이 인심좋게 둘의 입안에 왕사탕 하나씩을 끼워주어 싸움은 끝났다. 무영은 마루에게서 전화를 받고 난 뒤, 힐끔 은율을 바라보곤 말했다.
"아까 말한 간식, 뭐 먹고 싶냐?"
30분 뒤, 정확히 15만 3천원이 현금으로 있었던 지갑이 파산난 채로 무영은 식당 안에서 했던 짓과 똑같은 짓을 은율에게 해야만 했다. 떡꼬치, 닭꼬치와 떡볶이, 순대, 김밥, 튀김 따위의 음식류는 그냥 보기엔 하찮은 가격이라 간식비로 몇 푼이나 나갈까 하며 하찮게 여겼던 무영에겐 예상 외의 지출이었다. 어이없어하는 무영의 등을 두드리며, 은율은 '야, 너무 놀란 거 같으니까 이만큼만 먹을게' 라는 말로 무영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무영은 은율의 뒤통수를 응징하려 들었고 은율은 그 손길을 잽싸게 피했다.
"아 거 쪼잔하게!"
"그 쪼잔한 놈한테 한번 맞아볼 테냐!"
쫒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대낮에 벌어진 난데없는 추격전은 영화에서는 좌판이 엎어지고 사람이 다치는 등의 난리판이 벌어지겠지만 그들은 차차웅이다. 처용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덜 보기 위해 그들은 공중에서 치고박고 싸우는 쪽을 택했다. 지붕에 지붕을 타고 날아다니는 그은율의 솜씨가 하루 이틀 한 폼새가 아니었던지라, 익숙하지 않은 무영이 먼저 지쳐 버렸다.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는 무영이 옆으로 조심히 다가온 은율의 손에는 먹다 남은 떡꼬치가 여전히 들려 있었다. 무영이 이를 으득 갈았다.
"넌 위장 좀, 줄여, 망할 자식이..."
은율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물주는 소중한 법이다.
은율과 술래잡기를 하고, 그 이후에도 새하를 찾으며 몇 번이고 둘은 티격태격 다퉜다. 간단히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를 놓고, 혹은 목마른데 마실 걸 고르면서도 싸웠다. 한참을 싸우다가 지친 둘은, 합의를 하기로 했다.
"솔직히 안 지치냐, 벌써 해도 지고 있는데."
"그래. 그러니까 좀 얌전히 있어.... 망할 자식이."
무영은 투덜거리면서 무의식적으로 은율의 머리에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한 은율이 두 걸음 떨어지자, 무영은 재빨리 손을 치우곤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 아니 뭐 묻은 거 같아서."
은율은 웨엑, 하는 표정으로 섰다가 턱짓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해 지는 거 봐라. 언제 새하 찾을래?"
무영은 은율의 고갯짓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날이 좋아, 붉은 노을이 뚜렷이 잘 보였다. 높은 건물이 없는 마을에서는 산 너머로 지는 해와 붉게 타오르는 하늘이 선연하게 다가왔다. 무영이 얼굴을 찌뿌렸다.
"얼마 안 남았는데..."
"밤 되기 전에 이 녀석 찾아야 할 텐데"
"아니, 그거 말고."
무영이 피식 웃었다.은율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 때와 같은 순수함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영의 그 눈빛에 은율이 잠시 멈칫했다.
"하루만에 폭삭 늙은 거 같다, 너?"
"그러게"
"새하 찾으면 너부터 봐달라고 해야겠는데, 이 자식 진짜 어딨는 거야..."
뒷머리를 박박 긁는 그 모습마저도 이제는 낯설게 보이는 시간이었다.
"은율"
은율이 순간 굳었다가 펄쩍 뛰었다. 아니 이 미친놈이 뭐라는거야! 내 이름은 귀여운 여자애들이 아니면 부르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고! 소름돋은 얼굴로 팔딱팔딱 뛰는 모습을 보며 무영이 마지막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봐서 좋았어...."
무영은 제가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었다. 파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 이미지가, 혹은 은율의 이미지가, 거울이 깨지듯이 조각나 부서졌다. 이건 꿈이었나, 아니면 현실인가. 무영이 천천히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제 방이었고, 옆에 호가 있었다.
"랑아, 괜찮아?"
걱정스레 묻는 호의 말에 무영이 피식 웃었다. 몸은 멀쩡했다. '마더'는 제게 무슨 환상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무영이 여상하게 답했다.
"아주 좋아."
네가 있었다.
꿈이라고 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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