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연은 경악스런 표정이었다. 윤은 웃으면서 말했다. 뭐 어때서 그래, 보기 좋은데. 그 말을 못 들었는지 희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한 달만에 6kg이 쪘다. 물론 윤과 희연 둘 다였다. 윤은 몸 상태가 나아지면서 살이 붙은 것이니 희연은 물론이고 새하도 좋아해주었다. 하지만 희연은 다르다. 희연은 늘어난 제 몸무게의 원흉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신무영. 하여튼 이 남자가 문제다.
희연은 무영의 보디가드였다. 일단 명목은 그랬지만 희연은 무영의 옆을 지키고 섰다기보담은 잡일이나 좀 거들고 말이나 전달할 뿐이었다. 큰 일이랄 것도 없어 시큰둥하게 하루가 가는 걸 구경하는 기분이라 언젠가 희연이 무영이 있을 때 스치듯 중얼거렸다.
이게 뭔 보디가드야.
그걸 무영이 들었다. 희연은 그것을 크게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확실히 보디가드가 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다음 날부터 무영은 희연을 불러다 바깥에 있을 동안은 종일 붙어 있으라 일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연은 별 생각이 없었다. 이제야 일 좀 하려나 싶었을 뿐이었는데.
희연이 간과한 것은 무영이 보기보다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무영은 제 식성을 남에게 딱히 보이려 하지 않아, 식사는 보통 혼자 하는 편이었다. 무영의 식사 파트너는 자연히 희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네가 얼마나 먹든 신경 안 써. 모드였던 희연은 곧 난관에 부닥쳤다. 무영은 식사 시간이 따로 없었던 희연에게 굳이 서로 불편할 필요 없이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희연은 무영이 시킨 어마어마한 음식량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희연은 그 음식들이 전부 뱃속으로 사라질 줄은 몰랐다. 회장의 돈지랄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신무영은 참, 잘 먹었다.
사실 희연은 입이 짧다. 이전에는 요리의 맛을 따지고들 상황이 아니었고 제 식성에 뭐라할 사람이 없어 편식이 습관으로 굳어진 케이스였다. 희연은 육식을 주로 했다. 채소류는 토끼나 먹는 풀떼기라며 굳이 먹어야 할 필요를 느끼진 않았다.
신무영을 만나기 전까진.
사실 이전에 탈들이 희연을 데려간 식당도 호화롭고 맛있는 곳이긴 했다. 그래서 입 짧은 희연도 배가 불러터질 정도의 양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영이 먹는 요리들도 하나같이 훌륭한 맛이었다. 심지어는 가지나물조차도!!! 희연은 무영과 같이 식사한 첫날부터 깨달음을 얻었다.
맛있다!!! 내가 언제나 이런 거 먹어보겠어. 이 때 많이 먹어놔야지!
무영과 함께하는 식사가 한 달을 연이을 것을 몰랐던 희연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무영은 무영대로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희연의 입이 짧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먹여보니 생각보다 잘 먹은 탓이었다. 고기를 좋아한대서 한상 차려놨더니 희연의 젓가락질에 속도가 붙는다. 처음 보는 요리에 거부감을 느껴 안 먹으려 드는 것도 한입만 먹여보면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먹어댄다.
처음 두어번의 식사는 이자식 무슨 의도야라는 듯한 떫은 표정으로 조용히 식사가 나오길 기다렸는데 시간이 지나자 식사 중에 메뉴 이름을 물어볼 정도로 익숙해졌다. 식사를 같이 하면서부터는 무영을 불편해하는 기색도 줄었고, 말을 붙이는 것도 꽤 편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예상치 않은 반응이었지만 꽤 좋았다.
식사가 나오기 전의 설레는 표정, 한 입 먹고 난 뒤의 수줍은 표정과 배불러 더 먹지 못하는 아쉬운 표정까지. 무영은 진심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이럴 때 보이는 희연의 제 나이대의 모습은 꽤나 귀여운 맛이 있었다.
희연은 몸무게를 잰 날부터 무지막지하게 운동량을 늘렸다. 아무래도 살을 빼야겠다는 각오와 그래도 밥은 맛있으니까 안먹지는 못하겠다는 욕심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들어오는 양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살은 도통 빠질 생각을 않았다.
희연의 그 노력이 다른 쪽으로 바뀐 것은 마루가 무영과 대화하는 것을 봐서였다. 1세대 차차웅의 능력은 2세대에 비해 압도적이라곤 했지만 작은 총기류에서 중화기류까지 다양하게 구현하는 그 능력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희연의 구현능력은 단순한 날붙이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총을 구현하려면 총의 구조와 재질을 정확히 알고 오차없이 만들어 낼 섬세함과 그만큼의 힘이 필요하다. 무영은 그렇다치고 마루마저 간단히 총기를 구현하는 것에 희연은 좌절을 넘어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운동에서 구현으로 희연의 훈련 내용이 백팔십도 바뀌었다.
사실 희연은 구현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다. 감염자를 처리할 때도 빠르고 단순한 구현과 잽싼 몸놀림, 훌륭한 상황판단으로 일을 처리했었다. 그렇기에 구현에는 초심자인 희연이 할 수 있는 것은
".....알려줘..."
늘 그랬듯이 윤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왜 갑자기?"
나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녀석이(실제로는 3배쯤 연상이겠지만) 까다로운 구현을 하는 걸 보고 질투가 났다고 솔직히 말할 수 없었던 희연은 그 질문에
".... 그... 보디가드니까... 좀 배워놔야지!"
라고 응답해 윤을 웃게 만들었다.
물론 웃지 않은 사람도 있다. 새하는 윤의 의사로서 건강하지도 않은 몸뚱아리가 뭔 능력을 계속 쓰려 드냐며 희연과의 수업을 단칼에 무산시켰다.
"그럼 누구한테 배워!"
"여서 니보다 구현 잘하는 아는 쌔고 쌨다. 신무영이 그놈아한테 배우등가."
"그건 ... 싫어."
"쨌던 이놈아는 안된다. 신무영이 실타카믄 다른놈을 붙여줄기니까 있어바라."
그리고 지금, 희연의 눈앞엔 무영과 똑 닮은 얼굴을 한 남자가 말한다.
"보디가드씨는 오늘부터 나랑 특훈하자."
호는 진심을 담뿍 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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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은 좋은 학생이었고, 호는 좋은 선생이었다. 이전에 어린 꼬맹이에게 구현의 처음부터 가르쳐본 적이 있다고 하더니 말 그대로 꽤나 인내심을 가지고 희연을 가르쳤다. 희연도 요령을 피우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호가 시키는대로 열심히 구현을 연습했다. 물론 연습은 희연이 무영의 보디가드 업무를 마친 다음이기에 꽤나 늦은 시간대가 되었고, 자연히 아무도 없는 시간대이기에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다. 어색한 둘의 사이는 그렇게 천천히 메꿔졌다. 그 때문에 희연은 본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저와 닮은 ‘누군가’에 대한 정보를 잔뜩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다들 희연을 보면 그 남자의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마냥 굴었으니.
“그 녀석, 먹을 거 무지 좋아했거든. 같이 지내면서 엄청 놀랐어.”
“지금 신무영만큼 먹어?”
희연은 어려서부터 국가기관에서 일한 만큼 존댓말이 서툴렀다. 버릇처럼 툭툭 튀어나오는 반말을 호도 무영도 눈감아주었다. 제 위사람에게도 딱히 존댓말한 걸 본 적이 없다며 고개를 젓는 윤의 말을 듣기도 했고, 무엇보다 ‘얼굴’ 이 그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백정을 닮은 이가 존댓말을 한다는 것 또한 그들 입장에선 어색한 부분이기도 했다.
“뭐... 그 녀석 죽고 나서 랑이 먹성이 그만큼 늘긴 했어. 그래도 아마 절대미각 같은 건 못 배웠을 거야. 같이 살던 꼬맹이가 그러는데, 그 녀석 진짜 절대미각이라더라.”
“그런 만화같은 설정은 또 뭐야?”
“어, 아냐아냐. 진짜라구. 먹이는 족족 요리 이름을 맞춰서 신기해했다더라.”
“......그으래?”
불성실한 희연의 대답에 호가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 진짜라고…
어느 날은 또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워낙에 붙임성이 좋아, 다른 이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초랭이탈과 몇 달을 같이 살고 일도 같이 했다고. 희연은 어이가 없어서 ‘아니 왜 남한테 빌붙어 살어?’ 라고 큰 소리를 냈다. 그 태도에 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난들 아냐.
하찮고 사소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
“나랑 닮은 게 그렇게 신기한 거야?”
“정말 닮았으니 그러지.”
할미탈, 하나린이 말을 받았다. 할미, 부네, 새하 셋은 왕에게 윤을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었다. 윤이 걱정이 된 나머지 희연이 깍두기로 낑겨서 다녀왔다. 어두운 희연의 표정을 보며 부네탈인 아라가 입 을 연 것이 시작이었다. 왕이 저렇게 도와준 것도 역시 희연님의 얼굴을 봐서일까요?
희연은 물끄러미 제 얼굴을 잽싸게 구현한 거울로 비춰 보았다. 샐쭉한 표정의 제 얼굴이 비쳤다. 별다를 것도 없는 얼굴인데, 싶어 고개를 들자, 새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닮긴 했다. 첨에는 설마 누가 갸 시체로 인형을 만들었나 싶어가 한참 봤다아이가.”
“…그건 또 뭐야?”
“아, 차차웅 중에는 그런 능력 가진 아들도 있거든. 아, 그래. 니는 강시라는 단어가 더 익숙할기다. 강시 같은 거다.”
“인형사는 굉장히 드물잖아요?”
“당연하지. 나도 오래 살았지만 인형사를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인걸.”
다들 화기애애하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한다. 희연은 문득 저와 닮은 그 사람이 궁금해졌다. 모두의 입에서 오르내리지만 막상 한 번도 그들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적이 없었다. 들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별 생각 없이 들었던지라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이번에는 절대 잊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며, 희연이 물었다.
“그런데 맨날 나랑 닮았다고 말하던 그 사람, 이름이 뭔데?”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갑작스럽게 침묵이 무겁게 깔렸다. 희연이 제 질문이 그렇게 위험한 것이었나를 고민할 때쯤, 하나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그 녀석을 모르지.”
“당연하지…?”
“그 녀석은 자기 이름을 남한테 가르쳐주는 걸 싫어했어. 차차웅이나, 남자들한테는 더더욱. 인간 여자애들을 좋아해서, 그 애들한테는 쉽게 가르쳐줬지만.”
“그런데 참 희안체, 니는 사실.... 갸랑 관련도 없는데 이리 우리가 붙들고 있고...”
“아니, 아니, 나는 그렇게까진, 그냥 이름만 물어...”
갑자기 아라가 일어서더니 희연을 그대로 잡아 일으켰다. 가볍게 몸이 들린 희연은 그대로, 그 방에서 쫒겨났다. 아라는 어안이벙벙한 희연을 앞에 두고, 쓸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로… 죄송해요.”
쾅, 하고 희연의 눈 앞에서 문이 닫혔다.
문을 닫아건 뒤 돌아선 아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둘도 침통한 표정이었다. 아주 행복하고 긴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한 아이마냥.
“알고 있어요, 사실 환생도 무엇도 아니라는 거...”
“우리도 바보는 아이다. 안다… 차차웅한테 환생이 다 뭐꼬, 그런 거 없다.”
“아는데… 그 바보같은 놈한테 옮았는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하나린이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 아이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
“우리가 백정이 그리워 저 분을 자주 부른다는 걸 저 분도 알까요?”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우리가 저 애한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새하가 머리를 짚었다.
“한 번도 우리는 쟈를 제대로 봐준 적이 없제…”
다만, 백정을 비추는 거울일 뿐. 뒷말을 삼키며 새하는 침묵 속으로 함께 가라앉았다.
**
희연은 단단히 화가 났다. 저만 쏙 빼놓고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더니, 순식간에 저를 쫓아내는 건 또 뭐란 말인가. 희연은 투덜거리며 호를 찾았다. 저를 닮은 남자의 이야기는 집안에 있는 모두가 떠들어대니, 이름 정도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호, 신무영, 심지어는 마루마저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게 웃다가, ‘이미 죽은 사람이야’ 라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지을 뿐이었다. ‘맨날 나 닮았다고 해 놓고서 이제 와서 왜 숨기는 건데!?’ 하고 따져봐도 소용이 없었다. 답답함에 짜증이 치솟는 나날이 늘었다. 거기다 무영은 한동안 밖으로 나가며 희연을 데리고 가지도 않았다. 거기에 짜증이 난 희연은 호가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어색하게 웃은 날로부터 호를 보러 가지 않았다. 결국은 애꿎은 윤이 희연의 투덜거림을 다 들어 주고 있는 판국이었다.
“말도 안 되잖아? 나만 보면 맨날 닮았다, 닮았다. 그래놓고 이름 하나 안 가르쳐주니 웃기잖아!”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어서?”
“그거랑 이름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게…”
사실 윤도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으므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가, 아차 하고 생각이 난 듯 조심스레 희연에게 권했다.
“그, 왕이란 사람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왕... 아,”
“내일 어차피 한 번 더 가야 하니까.”
희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희연은 왕과의 첫 만남에서 기절한 전적이 있는데, 새하가 매우 간단명료하게 말을 전해 주었다. 그러니까...
“눈을 마주치지 말라고...했지”
“눈만 안 마주치면 정신을 잃을 일은 없다고 하니까. 슬쩍 물어만 보면 되겠지.”
왕의 특수능력과도 같아, 약한 2세대들은 왕의 기운을 버텨낼 수 없어 그런 것이라 했다. 억울한 마음에 희연이 이를 브득브득 갈며 다음번에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외쳤으나, 늘 왕에게 갈 때마다 희연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곤 했다. 어느 날엔가는 왕의 용마가 한 마디 한 적도 있었다.
‘쓸데없는 데 고집을 피우시네요.’
하지만 이번엔 물어볼 것도 있으니 그래선 안 되겠지. 희연은 각오를 다졌다. 각오를 다지는 희연의 옆에서 윤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관심 가질 게 아닌 것 같은데.
희연의 고집스런 얼굴을 바라보며 윤은 고개를 저었다. 하기사, 저 고집은 제가 꺾을 만한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