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타등등]

[그판세/ 중세판타지AU / 아마도 검법, 칼맠] I Believe 3

보랏빛구름 2019. 9. 12. 17:04

* 앞편에서 주의사항을 다 읽어오신 분들일테니 추가적 안내는 없습니다.

* 그판세 2차 창작 / 검법 메인으로 카를마크 



법사는 한참을 투덜거렸다. '아니 몸이 젊어졌으면 허리 통증도 없어져야 할 게 아니냐. 대체 왜 이건 낫지도 않는 게야?' 검성은 한참 투덜거리는 영주, 아니 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법사의 친구는 영지와 제법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가는 길이 제법 험한데다 날씨도 제법 더워서 말을 타고 가도 몸이 축축 늘어진다. 애초부터 체력이 좋은 편이 못 되었구나.... 검성의 어쩐지 불쌍해 보이는 듯한(?) 눈빛을 받으며 법사는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힘주어 들어올렸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그리고 지나치게 오랜 시간동안 말에 탔던 탓인지 법사는 검성이 노숙을 위해 편 자리에 누워서 그대로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검성은 법사가 죽었나 싶어 코밑에 손을 대 보기도 했고, 모닥불을 피운 뒤에는 슬그머니 가슴께에 귀를 대어보기도 했다. 편하게 자라고 옷자락도 좀 풀어주고, 자고 있는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다 어쩐지 효도하는 착한 어린이 같은 기분이 되어 괜스레 물수건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주워 왔다. 아무튼 물수건은 죄가 없으니까.) 오랫동안 영주였거나, 혹은 영주 아들내미였을 법사의 손은 부드럽고 물집 하나 없었지만.... 검성은 저와 비슷한 나이대일 법사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것 치곤 고생을 많이 한 느낌이었는데.

보통 영주들이 드래곤 잡으러 직접 가던가? 

아니, 그전에... 영주가 이렇게 오랫동안 밖에 나와 있어도 되나? 

무슨 영주가 그렇게 마법을 잘 써요? 나 아크메이지 처음 봤는데, 그럼 더 떵떵거릴 수도 있을건데, 왜 형은 그런 작은 곳에서 영주로 지내요?


궁금한 게 많고, 물어볼 것도 많지만 어쩐지 법사는 말해주지 않을 것 같다. 검성은 어쩐지 서운한 감정을 느꼈고, 그런 자신에게 제풀에 놀라 입을 꽉 막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섰다. 그 큰 몸짓에 언뜻 잠이 깬 법사는 부스스한 눈을 하고선 검성을 바라보았다. 


검성은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날 챙겨줘서 고맙다? 짐이 되어서 미안해? 복잡한 마음과 달리, 법사는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혼자 궁상스럽게..... 뭐 하는 게냐?"


검성은 다짐했다. 내가 내일도 저 양반 잠자리를 봐주면 사람이 아니고 개다 개.




*** 



카를로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친화력이 높은 사람이었다. 고작 사흘만에 성 내 사람들과 친해져 부엌에서 간식을 얻어먹었고, 체니와는 몰래 성 밖 거리에도 놀러갔다 온 것 같았다. 하지만 마크에겐 그것보다 더 큰 고민이 있었기에 체니를 불러다 나무랄 시간조차 낼 수 없었다. 체니는 시장이나 밖으로 카를과 함께 한껏 놀러 나가도 저를 혼내지 않는 마크를 멀찍이서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최근엔 식사도 거르는 것 같아 체니의 걱정은 커져만 갔다.


"오빠는 늘 혼자서만 고민하고 혼자서 해결하려 들어요. 나도 도와 줄 수 있는데."


그런 체니의 등을 부드럽게 도닥이며 카를이 웃었다. 카를이 보기에 체니는 참 당차고 씩씩한데다 긍정적이기까지 한 아가씨였다. 어쩌면 마크보다 영주 자리에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남이 들으면 기함할 생각이 들 정도로.


"원래 '영주'라는 자리가 그런 법이라잖아."

"그래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잖아요!"


체니가 항변했다. 카를은 그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본인이 같이 들 생각이 없으니.... 어쩌겠니."



그 날 저녁, 카를은 주방장을 구워삶아 초콜릿과 딸기주를 가지고 마크의 방문을 두드렸다. 마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고 외부인은 출입 금지라는 가차없는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카를은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생각이 많아져서, 뭐 먹지도 못한다고 주방장이 하도 고민해서 한 잔 가져 왔는데... 주방장이 몇 시간동안 만들었다고 고생했는데.... 나한테 꼭 먹이고 오라고 했는데... 쭈굴쭈굴해지려는 카를을 바라보며 마크가 긴 한숨과 함께 몸을 뒤로 뺐다.


"하나만 먹고 나면 나가."

"사람이 그렇게 굴면 정없어."


방은 권력자답지 않게 소박했다. 옷이나 소지품에서도 느껴지는 절제된 검약이, 공간이 되어 짓누르는 기분이라 카를은 잠시 몸을 떨었다. 천이 좀 더 고급지고 가구마다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면 수도승의 방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이럴 때는 술이지! 한 잔 마시고 푹 자면 낫지 않을까?"

"...."


딸기주는 마크가 좋아하는 술이었고, 도수도 매우 낮아 몇 병 마신다고 취할 일도 없었으므로, 마크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카를은 조용히 잔을 채워 주었고, 입 심심하지 않게 초콜릿도 두어 번 먹여 주었다. 마크는 불편한 얼굴이었지만, 주방장의 고생을 떠올리며 조용히 받아먹었다. 마크는 가볍게 웃으며 비워지는 잔을 즐겁게 감상했다.


"딸꾹,"


그리고 술을 두 병쯤 먹었을 때, 마크는 완전히 취해버렸다. 초콜릿을 세 개쯤 먹었을 때였다. 카를은 초콜릿 하나를 입에 물었다. 달달한 초콜릿 맛에 섞여 약한 보드카 맛이 났다.


그래도 이 정도에 취하다니 진짜 귀엽네.


마크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발그레했고,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카를이 마크의 옆자리로 당겨 앉아서 마크의 늘어진 몸을 받쳐 안고 조용히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손길에 마크가 끙끙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고민이 있으면, 털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지?"

"... 그게.... 그런가?... 아니... 그래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잖아. 좋은 방법이 생길지도 몰라."

".... 좋은 방법이?"

"그래."


마크는 딸꾹질을 두어 번 하곤 작게 속삭이듯 말햇다.


"... 어떡하지? 나는... 길을 모르는데... 언제 수도로 가서 영주직을.. 받지...... 체니는... 안돼, 혼자 있기는... 아직 너무 어리고.... 아버지는 언제 오실까...? 무사하시겠지? ... 수도로... 가야 하나? 영주직을... 받고, 빨리 오면... 얼마나 빨리?...."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거기다 횡설수설했지만 카를은 잽싸게 그 말의 포인트를 잡아챘다.


"왜 영주직을 받아야 하는데?"

"... 아버지가, 편지로.... 늦으신다고...."


흐음~ 그게 고민이었구나. 발랄한 카를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어쩐지 성실한 마크다운 걱정이긴 했다. 사실 이 주위의 영주들은 이 지역에 관심도 없을 뿐더러, 주인이 비었다고 당장 여기를 치러 올 성격들도 아니었다. 그러니 부친이 그런 편지를 보냈겠지. 하지만 이 고지식한 남자가 그 말을 곧이들을 리가 없다. 그런걸로 이렇게 끙끙 앓을 줄이야, 귀엽잖아.


"내가 도와줄게. 응?"


속삭이는 목소리가 달콤하다. 마크는 응, 하고 중얼거렸다. 응 도와줘. 제정신으로라면 결코 하지 못할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