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판의 시계가 정확히 10시 30분을 가리키면, 그는 그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라는 듯 정확히 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역시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는 남자라고, 흘끗 남자와 건너편 영화관 전광판에서 보여주는 시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굳이 남자라는 3인칭 표현을 쓸 필요는 없다. 이름은 카타쿠라 코쥬로, 29세. 지금도 자신과 10년 차이일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추정해 본다.
아이스커피의 싸늘함에 차가워진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으며, 마사무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산 아이스커피는 금방 플라스틱 표면에 물기를 만들어낸다. 그 물기가 조금 짜증이 나서, 들고 있던 손을 옮기고 다시 코쥬로를 바라본다. 제법 먼 거리다. 다가오려면 열 걸음 쯤, 아니 좀 더 걸어야 할 거다. 이쯤이 딱 좋다고, 거리를 다시 어림잡아 재보고는 부러 거리를 빤히 바라보다 다시 힐끔 시선을 돌린다. 코쥬로는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가 영화 팜플렛 쪽을 한번 바라보다 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 영화를 보지 않은지 몇 년이 지난 지 알 수 없어서, 아마 그런 화제로는 몇 분도 이야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짧게 한숨을 내쉰다. 코쥬로는 공포를 좋아할까? 여름이니까. 그렇지만 의외로 판타지를 좋아할지도. 아니, 연인이 있으니 로맨스려나. 드라마틱한 걸 즐길 취미는 없었던 것 같았는데... 하긴, 이 시대에 있는 많은 것들을 그 때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었으니. 그 시대와 이 시대는 너무나 다르구나. 그렇지만 너와 나의 이름이 그 때와 똑같은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인연이다. 문득 내 등 뒤에서 늘 나를 지키던 그가 잠시 그리워져, 멀찍이 서 있는, 검은 양복을 입은 코쥬로의 모습 위로 과거, 내 가신이었던 코쥬로를 덧대어 본다. 갈색 코트, 무장을 하고, 자신을 보면서, 마사무네님- 이라고.......
어, 잠시 이쪽을 본 것 같다. 어쩌지, 어쩌지, 빤히 보고 있던 거 들켰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억지로 삼키고 영화 시간을 확인하는 척 한다. 시선을 거두는 속도는 빠르다. 흘끗 시간을 보니 10시 57분. 짧게 친 머리에 예쁜 여자 하나가 코쥬로를 보며 웃어주자, 코쥬로도 곧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잡아준다. 뭐라뭐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나직하게 말해서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손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주말알바는 저녁부터다. 오후는 뭘 하지? 책이라도 보러 가야겠다. 책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의 집이라는 공간이 2평 남짓인 원룸에 여름엔 덥고 겨울에 추운 최악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장 돈 안 들고 시원한 공간인 도서관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걷는 걸음걸음에 힘이 빠졌다. 점심을 먹지 않아서도 아니었고, 도서관을 가는 길이 멀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웃어주는 네 얼굴이 기억으로 얌전히 남아주지 않고 머릿속에서 너무나 서걱거려서.
코쥬로.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나-
이미 시력을 잃어버린 오른쪽 눈이 욱신거려, 안대 위로 잠시 손을 대고 꾸욱 눌렀다. 아이스커피를 쥐고 있던 손은 시원했다. 얼음이 다 녹아 닝닝해졌을 아이스커피를 물 마시듯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기며, 쿡쿡 쑤셔가는 눈의 통증을 악물어 견뎌냈다. 잠시 핑 돌 것 같던 두통이 엄습하더니 다시 서서히 멎어든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확보되는 시야에 안심한다. 등이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누어 그 자리에 서서, 쓰레기통에 빈 커피통을 버리며, 텅 비어버린 쓰레기통에 빈 플라스틱이 부딪쳐 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사무네는 잠시, 이 통증이 자신의 목숨을 삼켜버릴 날이 언제일까 고민했다.
그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은 굉장히 흐릿한데, 다섯 살 생일까지는 케이크와 많은 선물을 받았으니 아마 그때까지는 부유했으리라 생각된다. 비극-그것을 비극이라 해야 할까.-은 그 이후부터였다. 여섯 살 때 쯤인지, 그는 뚜렷이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런 것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은 어제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그저 아침에 눈을 떴고, 조금 늦잠을 자서 시침이 11을 가리키고 있어 놀라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화를 낼 어머니의 모습이 두려워 머뭇머뭇 아래로 내려가자, 온통 빨간색 스티커가 붙은 건물과, 그 사이에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어머니... 늦잠자서 죄송해요." 라고 울먹거리며 말했고, 어머니는 그런 나를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아버지는요..? 언제나 어머니 곁에 있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그렇게 물었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방을 끌어 나가려고 했다. 나는 머뭇머뭇 어머니의 발치에 섰다.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단지, 자살했다- 네 아버지가. 그 말 한 마디만을 들었다. 작은 손을 들어, 그 말을 하는 어머니를 붙잡았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고, 어머니가 사라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나를 떠밀고 사라졌다. 그 날 어머니가 떠나고 나서 공포에 질려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어머니가... 말은 거기서 끊어졌다. 아버지가 자주 앉아 있던 의자 근처에 피가 가득했다. 아아아아악!!!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대로 고꾸라져 기절했다.
그렇지만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던가. 운이 없었다. 그렇게 기절하면서, 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던 것 중 하나에 정확히 오른쪽 눈을 직격당해, 그대로 실명했다. 아마 아버지가 아끼던 도자기의 깨진 조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응급처치로 적당히 상처를 봉합했고, 그 이후엔 안대를 썼다.
훑어보자면 우습기 그지없는 내용들 뿐이다. 이후의 일은 뻔하다. 고아원에서 살면서 주먹은 늘었지만 그닥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살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따분했다. 누군가를 패는 것도 지겨웠고,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것은 역겨웠다. 그래, 너를 보기 전까지는, 코쥬로.
우연이었다. 우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수많은 길들, 그래. 나는 코쥬로를 길을 가다 마주쳤다. 그 때, 코쥬로는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였다. 나는 코쥬로를 금방 알아보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름을 불렀다. 코쥬로, 코쥬로! 너는 나를 돌아본다. 금방 놀란 표정을 짓고 웃어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래, 내가 있으니 너도... 그런 감상에 젖은 나를 깨우는 목소리는 , 분명 너의 것이었다.
"누구십니까."
- 쿵. 하는 소리가.
"죄송합니다만, 저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심장에서.
"일행이 있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코쥬로-...
그래도,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네가 여기에 있었으니까.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있었으니까.
코쥬로를 다시 찾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천애고아였고, 내 먹을거리는 내가 찾아야 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나를 써주는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간신히 PC방 알바와 편의점 알바를 찾았다. 매일매일 10시간 정도 알바를 뛰어서 간간이 먹고살았고, 잠은 자야 했기에 자고, 밥이야 적당히 뭐든 먹으면서 넘겼다. 코쥬로를 본 뒤로는 거리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코쥬로, 너를 찾아서. 너는 이곳에 있을테니까. 나는 네가 보고 싶었으니까.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여자친구가 있어도. 자주 보지 못하더라도.
그러다가, 그 영화관 앞에서 너를 만났다. 우연이었다. 아무리 봐도 월수입 40만원은 좀 힘겨웠다. PC방이나 편의점 알바는 월급이 너무 짰다. 먹고 산다는 것은 이다지도 힘겨웠다. 그래서 알바를 좀 더 찾으려고, 전단지란 전단지는 모두 모아서 뒤적거리던 참이었다. 눈이 너무 아파 주위를 둘러보다가 순간 스쳐가는 너를 보았다. 그 때 시간이 10시 58분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그 시간에 매일매일 기다렸다. 너를. 그리고 주말마다 네가 이 곳에서 애인과 만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기까지 3주를 널 보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
늘, 10시 30분부터 30분 동안 네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너.
나는 그리고 그 시간동안, 너를 바라본다.
단지 같은 공간에서, 나의 시간은 빠르고, 너의 시간은 느릴 것이다. 우리의 열 걸음은, 500년간의 차이다. 그러니 결코 닿지 않겠지. 닿을 거라는 꿈 같은 시간은 바라지 않는다. 단지, 네가 너를 바라보는 이 30분이, 내 뇌리속에 그 이상으로 새겨져, 시간이 지나도 결코 벗겨지지 않을, 그런 강도를 갖기를 나는 바란다. 그렇다면 나는,
이 생 또한, 웃으며 뒤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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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랑 약속했으니 아마 3-5편 정도로 완결나지 않을까 합니다... 만
제목이 생각 안나네요 ; 여튼 여기서 더 이을려겨든 카테고리 하나 생성해야겠군녀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