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히로아카]

[바쿠토도바쿠] 주지 못하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

보랏빛구름 2016. 6. 20. 20:35

아주 오랜만에, 행복한 꿈을 꾸었다.

네 눈을 마주쳐도 네가 화내지 않는 꿈을 꾸었다.






내 세상은 온통 무채색에 얼어붙어 있었다. 세상은 참 차가웠다. 어렸을 때 내 소원은, 아빠와 엄마와 셋이서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는 바라지도 않을 이야기지만. 어렸을 때엔 다들 그런 소원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한다. 


나는 좋아하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엄마. 그 이전엔 누나와 형들이 거기에 끼었던 것 같지만, 다섯 살 즈음에선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면, 누나와 형들은, 나를 참 싫어했었으니까. 누나와 형들은 엄마와 여럿이서 자주 놀 수 있었다. 나는 거기에 끼지 못했다. 대신 아빠는 내 옆에만 있었다. 내 옆에 없으면 집에도 없었다. 누나와 형은 그게 참 싫었는지, 내게 가끔 쓰레기를 던지며 화를 냈다. 그래서, 형과 누나는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참 좋았다. 따뜻하고, 늘 나를 안아주었다. 엄마의 품 속에서라면 뭐든 괜찮을 것 같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엄마의 품 안은 늘 평화로웠다. 


 아빠는 내게 화를 자주 냈다. 나는 최고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아빠와 함께 있는건 무섭고, 아프고, 슬펐다. 내 '개성'이 발현된 나이때부터, 나는 아빠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무서워했다. 아빠의 손이 닿은 곳은 멍이 들거나 피가 났다. 아픈 것은 싫었다. 발현된 개성으로 손의 한쪽은 뜨겁고 한쪽은 차가웠지만, 차분히 내 손을 잡고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막막하고 아프고 어쩔 줄 몰라 우는 나를 달래주는 사람은 없었다. 한 주에 네 번 있는 아빠와의 시간은 내가 구역질을 하거나 아파서 쓰러질 때쯤 되야 끝났다. 엄마는 그런 나를 껴안고 울었다.  


엄마는 말했다. 쇼 짱, 쇼 짱이 좋아하는 사람은, 꼭 쇼 짱을 좋아했으면 좋겠어. 서로가 서로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그런 마음 같은 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쇼 짱이 아프지 않게......


나는 엄마가 울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아프지 않으면 엄마도 울지 않을까? 그래서 울지 않으려 애썼다. 아빠가 말한 사람이 되려고 했다. 그러면 엄마도 울지 않을 수 있겠지? 그러면 아빠도 화를 내지 않겠지? 그럼 나중엔, 엄마랑, 아빠랑, 셋이서 함께 놀러 갈 수도 있을 거라고.


철없던 시간이었다. 나의 상상은 상상으로만 끝났다. 내 소원은 얼굴의 흉터와 함께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아픈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없이 울었다. 아무도 달래주러 오지 않았다. 방에 처박혀 울기만 하다, 사흘째 되던 날 엄마의 방에 찾아갔을 땐 엄마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을 만큼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텅 빈 방이 마치 제 심장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 남자'에 대한 증오 외에는.


감정의 둔화라고 해야 할지, 혹은 마비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날부터 어떻게든 감정이 침묵하게 된 건 확실했다. 훈련을 받을 때마다 맞아도 서럽지도, 슬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차라리 편했다. 가족이건 주위 사람에게건 원하는 것이 없으니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 사람'에 대한 증오만으로도 살아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가족들의 무관심에도 별다른 감각이 없었다. 내 얼굴의 흉터와, 여러 가지 뒷처리 때문에 학교는 가지 못하고 홈스쿨링으로 공부를 했다. 다른 사람들을 별로 만날 수 없었지만 아쉽거나 궁금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 엄마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기억 속에서 엄마의 모습은 점점 지워져, 어느 날로부터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게 되었지만,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면 어렴풋이 느껴지는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이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지금에 와서야 할 수 있는, 작은 반성.



바쿠고 카츠키를 만난 건 1학년, 첫 수업 시간 때. 뭐였더라, 네 자기소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자신만만하게, 네 이름과 개성을 이야기하며 자기소개를 했었다. 그 모습이, 눈에 뚜렷하게 박혔다. 금발 때문이려나. 아니면 네 화려한 개성 때문이었을까. 보는 순간, 그냥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 같아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너도 시선을 맞부딪쳐왔다. 나는 어렵사리 시선을 내렸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너를 보고 있으면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손에 땀이 찼다. 긴장했나 싶어 옷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네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타인을 만나지 못한 나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 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너는 그 동안 네 오랜 친구라는 녹색 머리의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세차게 뛰는 심장이 낯설었다.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손끝을 심장에 갖다 대 보았다. 떨림이 남들에게 들릴까 괜히 걱정스러워서, 첫날에는 아무와도 말을 붙이지 못했다. 


너와 함께 지내면서 여러 가지를 알았다. 같은 교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너의 성격, 가치관, 소망, 꿈 같은 것. 자존심이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너. 강함을 추구하고 네 눈 아래에 둔 것들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너. 네 소중한 , 몇 안 되는 것들에 정성을 다하는 너. 그런 네가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지. 한없이 부럽고, 막연하게 사랑스러웠던 너의 모습을 조심스레 기억 속에 쌓아 둔다. 혹시 잊어버릴까봐 글로 써 두려고 했는데, 막상 글로 쓰려고만 하면 기억이 뚜렷이 나지 않아 몇 번이고 쓰다 지우다를 반복했었다. 그 장면을 그려도 볼까 했는데, 연필을 여섯 번 깎는 동안 완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엉망이 된 책상이 꼭 제 마음 같았다. 텅 비었던 곳이 가득 찼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너는 히어로 세계에선 꽤나 유망주라 인터넷 검색을 하면 사진 몇 장 정도는 얻을 수 있다. 인터넷으로 찾은 사진의 너도 늘 보는 너와 다르지 않다. 잔뜩 올라간 눈꼬리가 매서웠다. 그래도 직접 보는 네 모습이 가장 멋지다. 너는 강하고, 똑똑하며, 오만하다. 그 모습마저 멋있어 보인다고 한다면 이상할까. 너와 오래 알고 지냈다던 미도리야 군에게 직접 들은 바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고 하니 천성일지도 모르겠다. 미도리야는 친절하게 말해주며 나를 보고 웃었다. 미도리야는 환하게 웃는다. 신기할 정도로.


가끔 네게 묻고싶은 게 있었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이벌일까, 아니면 그냥 이기고 싶은 상대일까. 얼굴에 이상한 흉터가 있는 녀석일까 네 말마따나 반쪽이일까. 알고 싶지 않은 녀석일까..... 네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일부러 말을 삼키곤 했다. 이것 또한 낯선 경험이었다.






아마 내가 너와 만난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부른 날이기도 했다. 야, 반쪽이. 너 나 좀 보자. 낮은 목소리였다. 평소의 너답지 않은 차분함에 좀 당황했지만 곧 따라 나섰다. 마음 한 쪽이 간질간질했다.

한적한 교사 뒷편에서 너는 내게 말했다. 너, 한 번만 더 나 그딴 눈깔로 쳐다보면 죽여버린다.


"..... 아....."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내가, 너를 볼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꽤나 자주 바라보는 편이었으니까. 너랑 단둘이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프고, 손에서 식은땀이 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너는 내 모든 모습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 너도 알긴 아는구나?"


알지 못한다고, 이런 건 처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보는지 설명해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묻기에 우리 사이는 지나치게 멀었다. 정확히는, 어떤 의미에서든지간에 접점이 별로 없었다. 차라리 미도리야처럼 악연이라도 많았다면 좋았을까.....


"그딴 눈으로 나 쳐다보지 말라고. 존나 더럽거든."

"아니, 나는...."

"남은 헛소린 처 먹히는 인간한테나 해라."

"......."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너는 차갑게 내뱉는다.


"한 번만 더 그딴 눈깔로 날 쳐다보면, 그땐 영영 날 못 보게 만들어줄 테니까."


너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나는 한참이나 네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심장은 여전히 아프게 뛰는데, 여전히 온통 너만이 강렬한데, 이상하게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당황해서 옷소매로 얼굴을 닦아냈다. 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지, 왜 심장이 쥐어짜듯 아픈지, 왜 나는 네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는지 나는 그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 이후로, 나는 네가 있는 쪽을 차마 쳐다보지도 못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내 행동을 약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곧 그러다 말겠지 하곤 관심을 지웠다. 그냥 너와 내가 따로 다퉜거나, 아니면 내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고 생각한 걸수도 있다.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너를 기분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네게 내가 나쁜 기억으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네게 향하려는 시선을 억지로 책으로 잡아 끌었다. 내 책상에는 늘 책이 펼쳐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말했다. 내가 너무 아파서 울고 있을 때, 엄마가 울면서 내게 말했다. 쇼 짱, 쇼 짱이 좋아하는 사람은,  꼭 쇼 짱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서로가 서로를 좋아했으면 좋겠어.그렇지 않으면, 그런 마음 같은 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쇼 짱이 아프지 않게...... 아빠는 엄마를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엄마는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꼭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렴. 그리고, 그 사람이 꼭 너를 좋아할 때에만 함께 있으렴.


절대, 절대,엄마처럼, 혹은 아빠처럼 되지 마.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다. 강력한 개성, 눈에 띄는 성격, 확실한 판단력. 뛰어난 리더십. 너는 좋은 히어로가 될 것이다. 나는, 그런 네 앞을 가로막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 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너는 나를 싫어한다. 아마도, 싫어하거나, 혹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결과는 정해져 있다. 나의 행동이 너를 기분나쁘게 만든다면 그건 내가 고쳐야 할 일이다. 나를 싫어함으로 인해 혹시라도 네가 네 본모습을 잃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너를 찾는 눈을 감는다. 뛰는 심장을 모른 척한다. 첫날의 그 이상한 느낌은 없었던 거라고, 모르는 척 넘기려 애를 썼다. 내 생각을 적은 글과 너를 그린 그림을 모두 찢어 내버리며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제발. 네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네가 말한 대로 내가 행동하기를. 사실, 나만 없었으면 너는 여전히 그렇게 지냈을 텐데, 내가 미안해.


심장이 많이 아팠다. 아주 가끔 머리가 많이 아팠다. 속에서 구역질이 나 견딜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통증은 '그 남자'에게 두들겨 맞는 것보다 훨씬 깊고 예리하고 둔중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리커버리 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걸 보니 마음의 문제라고,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며 하리보를 한 봉지 챙겨 주었다. 받은 하리보를 친구들에게 나눠 주는 손 사이로, 네가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너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서. 내 못생긴 생각 같은 건 언제든지 눌러 죽여도 괜찮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네가 보지 말라고 해도, 모니터 너머로, 혹은 친구들의 어깨 너머로, 유리창 너머로, 아주 가끔씩은 수업 시간에 너를 직접 볼 수도 있으니까. 나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걸로 끝났다면, 괜찮은 일이지 않은가.






사실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지만. 

다 괜찮다고 믿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까.





끝내 버리지 못했던 몇 장의 종이와 매일매일 눈물로 젖어 있던 배게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너는 모를 것들이다. 몰라도 상관없는 것들이다. 내가 만든 쓰레기는 내가 치울 수 있다. 나 자신을 내가 어쩌지 못해, 언젠간 내 목을 내가 비틀 때가 오면 차라리 기쁠 것이다. 다만, 이 목숨이 아쉽지 않으니, 네가 필요할 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모두가 성장했다. 웅영고 1-A반 학생들은 모두 멋진 히어로가 되었고, 그 올마이트가 끝끝내 죽일 수 없었던 악당, "올 포 원" 을 맞이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빌런 연합'도 함께였다. 바쿠고와 토도로키를 투톱으로 내세우고 미도리야가 후방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쓰기로 결정되었다. 전투는 격렬했고 뇌무의 힘은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그 '올마이트'가 고전한 악당이 아니었던가. 

 정신없던 와중, '올 포 원'의 개성 중 하나가 바쿠고에게 날아들었다. 개성 "관통". 말 그대로,  원하는 것을 정확한 위치에 던질 수 있는 개성이었다. 그 개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토도로키였는데, 예전에 한번 저 개성으로 어깨가 그대로 뚫린 적이 있어서였다. 토도로키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바쿠고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던 창을 가로막은 건, 토도로키의 거대한 빙벽이었다. 그리고, 그 빙벽을 만든 토도로키의 배를, 뇌무가 꿰뚫었다. 그 뇌무의 머리를 토도로키가 그대로 불태워 날렸다. 뇌무가 옆으로 쓰러지며 토도로키의 몸이 그 반동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토도로키가 쓰러진 걸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이이다였다. 바쿠고는, 그 빙벽을 보곤 곧장 벽 반대쪽의 적을 치러 몸을 날렸기 때문에, 토도로키를 보지 못했다. 뒤늦게 피범벅이 된 토도로키를 발견한 우라라카가 비명을 질렀다.


토도로키 군-!!


 







빌런 연합은 모두 붙잡혔다. 한동안은 평화로울 수 있으리라며 상처투성이의 미도리야가 고개를 내저었다. 바쿠고는 지나친 개성 사용으로 양손에 붕대를 칭칭 감았고, 이이다는 다리에 석고붕대를 맸다. 다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토도로키는 중태였다. 히어로 순위 No.1자리를 미도리야와 다투던 그는, 이제 아마 정신을 차린다 하더라도 다시 무리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육체의 부상이 그토록 심각하다고 했다. 위, 장, 그 외의 기관들이 전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중태라고, 의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에 바쿠고가 고개를 떨구었다.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병실에 서 있었다. 중환자실은 함부로 누가 들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다만, 토도로키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히어로들에 한해 하루 두 명씩 면회가 가능했다. 토도로키의 가족 중 누구도 면회 신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엔데버는 토도로키의 상태를 전해 듣고는'실망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연락을 더 하지 않았다고 했고, 어머니는 병원에 계시다 했다. 그의 형제들은 딱히 오고싶어 하지 않았다. 장녀인 후유미가 한 번 연락을 해 왔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너무 멀리 있어 올 수 없었다.


"야"


토도로키는 더 이상 답하지 않는다. 사실, 바쿠고는 토도로키와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팀으로 엮이지 않으면 말도 하지 않는 관계였다. 이 관계를 만든 것은 바쿠고 자신이었다. 사 년 전의 대화로, 사이는 끝났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빚진 기분이 드는 걸까. 바쿠고는 그게 못내 못마땅했다.


 그런 적이 있었다. 이따금씩 느껴지는 시선을 쫒으면 토도로키가 있었다. 빤히 바라본 주제에 내가 저를 바라보면 시선을 내리던. 그 시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기분이 나빴다. 정확히는 기분이 엄청 더러웠다. 같은 거 달린 놈한테 그런 시선 받아봤자 하나도 좋지 않았다. 참을 만큼 참았다고 느낀 어느 여름 날, 녀석을 불러다가 말했다. 역겹다고, 더럽다고,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라고 말했다. 아마 그 이후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것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끝날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히어로가 되면서 빌어먹을 인연은 계속되었다. 어쨌건 간에 같은 판에서 일하다 보면 마주칠 일이 많았다. 토도로키는 여전히 저만 보면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편해야 하는데, 편하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시선은 떨어져나갔고, 알아서 제 입안의 혀처럼 굴어주고 있는데도. 토도로키는 짧은 인사조차도 없이 곧 다른 사건이 있다는 지역으로 잽싸게 사라졌다. 짜증이 난다.


이번 전투 시작 전에, 토도로키는 뭐라고 말 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바쿠고는 무시했다. 바쿠고의 눈앞에서 빙벽이 쳐졌을 때, 바쿠고는 짜증스레 그 빙벽을 넘어 빌런을 쓰러뜨렸다. 제 능력 컨트롤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라고 구시렁거렸다. 누구의 개성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 누군가를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전투가 끝난 뒤에 보게 된 너는 끔찍했다. 꿰뚫린 배에서는 내장과 피가 섞여 흘러내렸다. 죽지 않은 게 용하다고 했다. 그 다음 날, 변호사라는 것들이 왔다. 책상 위에 유서가 있었다며 유서를 읽어 주는데, 이 새끼 용케 저딴 집에서 살고 있나 했다. 숨 붙은 새끼 앞에서 뒈졌다며 그 이후의 일을 논하려는 치들을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그들은 유서의 사본을 건네고 사라졌다. 


바라본 유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제 재산은 가족에게 공동 분할하며, 제가 죽으면 불태워 강에 뿌려달라고. 제 방에 있는 빨간색 상자는, 안을 열지 말고 함께 불태워 달라는 게 전부였다. 혹여나 제 장기가 필요한 이가 있으면 나누어주겠다고도 했다. 곱씹어 읽을수록, 아무것도 없는 유서였다. 참으로 "이상적인" 유서가 아닌가. 네 존재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네 집 주소를 알아냈다. 무작정 네 집으로 찾아갔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는데. 가정부인 듯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길래, 네 친구라고 하자 문을 열어 준다. 친구라니, 말을 하면서도 역겨웠다. 너같은 새끼의 친구일까보냐. 혀를 깨물 뻔 한 것을 겨우 참았다. 네가 정신을 잃은지 오래 되었고,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너무 걱정이 되니 네 물건을 좀 가져가 보여주고, 혹시 책이 있으면 읽어주고 싶다고 했다. 거짓말은 술술 나왔다. 가정부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둑이라는 의심도 없는게 더 웃겼다. 하기사, 자신도 토도로키도 유우에이 고등학교에 다닌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이니. 그가 토도로키의 방문을 열어 주었다. 도련님의 물건은 별로 없습니다. 옷은 옷방에 따로 있습니다. 그러곤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간다. 


방에는 책 몇 권, 노트 몇 권, 네가 말한 빨간 상자, 그리고 컴퓨터와 잡동사니 몇 개가 전부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방은 네 유서를, 더 정확하게는 너를 닮아 있었다. 텅 빈 것 같은.


이야기한 게 있으니 뭐든 읽을거리를 들고가야지 싶었다. 일단 뭐 쓸만한 게 있나 노트를 펼쳤다. 노트에는 빌런에 대한 분석 따위가 적혀 있었다. 별 필요 없어 보여 덮었다. 나머지는  히어로들의 능력을 분석한 책 두 권, 그리고 간단한 소설책 여러 권, 딱 봐도 어려워 보이는 책이 서너 권 있었다. 소설책 중 제목이 낯선 것을 집어 잽싸게 챙기고 더 확인할 건 별 것 없겠지, 싶어 빨간 상자로 눈을 돌렸다. 열지 못하게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안을 보지 말고 태워 달라고 했던가. 괜한 심술로 자물쇠를 망가뜨렸다. 거칠게 상자의 뚜껑을 잡아 열었다. 네가 뭘 숨기든 간에,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는 너를 너무 모르니까.


 상자 안에는 스크랩북 여러 권과 종이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는 잔뜩 찢었던 것을 다시 테이프로 얼기설기 되붙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작은 상자가 대여섯 개쯤 들어 있었다. 시시했다. 속에 있던 무언가가 푸시시 식는 느낌이었다. 다시 상자를 닫고 자물쇠를 어쩔까 하다가, 이상한 기시감에 다시 상자를 열었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져선 새로 이어 붙인 듯한 종이 중, 가장 위에 올라간 것은, 너무나 익숙했다. 남들이 보면 시시한 추억거리라고도 할, 애가 그린 듯한 낙서 같았다. 하지만, 바쿠고는 머리가 좋았다. 기억력도 좋았다. 그 종이를 집어올리는 순간, 갑자기 시간이 빙글빙글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전 형질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어떤 형질을 유전적으로 타고나는지 그림으로 그리라고 했다. 각 개인이 가진 우성 형질과 열성 형질을 잘 알고, 적당히 잘 섞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바쿠고는 그 날, 토도로키와 같이 수업을 들었고, 운이 나빠서 같은 조로 서로의 얼굴을 관찰하게 됐었다. 그 날, 토도로키는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우성 형질과 열성 형질을 골라냈었다. 형질을 정리하는 글씨는 확실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손은 서툴어서 손이 병신이냐?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녀석의 그림 실력은 엉망이었다. 그 때 그린, 그 엉망인 그림이었다. 아래에 쓰인 글은 최근에 쓰인 것 같았다. 네임펜으로 쓴 글씨는 꽤나 지워져 희미했지만,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너의 아이는 널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 


우스운 글이었다. 짜증스레 다른 종이를 펼쳤다. 나에 대한 자잘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성격은 어떻고, 꿈은 어떻고 하는 것들. 다음 것은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운 글이었다. 온통 멋있어, 좋아, 예뻐, 눈을 못 떼겠어 따위의 짧은 단어들이 굴러다녔다. 

떨리는 손으로 스크랩북을 들었다. 첫 장을 펼쳤다. 페이지마다 내 활동이 잔뜩 모여 있었다. 스토킹이라기엔 형편없는 수준으로, 차라리 데쿠가 모은 히어로 자료에 있는 내 자료가 더 많겠다 했다. 신문 기사만을 오려 붙인데다가, 시간 날 때마다 붙였는지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다. 대신 오래 된 기사에는 손때가 묻은 듯 너덜했다. 역겨움이 밀려왔다. 


네 유서는 책상 위에 있었다고 했다. 이 활동에서 죽음을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을만큼 위험하다고 해서 누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허탈한 마음에 토도로키의 책상에 앉았다. 책상은 너무 깨끗해서 현실감이 없었다. 조심스레 상자를 제 위치에 갖다둬 본다. 책상에 앉으면 손으로나 쓸어볼 수 있을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곳이다. 하찮은 스크랩북 몇 권과, 쓸데도 없을 종이 몇 장을 위해 자물쇠를 달고, 마치 제 최후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유서를 책상 위에 올린 너의 마음이 소름끼칠 만큼 무거웠다.


"그딴 눈으로 나 쳐다보지 말라고. 존나 더럽거든."


얼마나 어릴 때였던가. 고작 열여섯이 한 말을 너는 삼 년이 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고. 얼마나 독하나면, 죽어도 제 입을 열지 않게 할 만큼. 내가 만약에, 한 번 더 무심히 네 유서를 넘겼다면, 혹은 네 상자를 무심히 닫았다면, 너는 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그대로 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의자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앉고 다시 상자를 꺼내 열었다. 이상하게 손이 덜덜 떨렸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상자를 하나 집어들었다. 리본이 곱게 매여 있었다. 리본을 풀고 조심스레 포장을 벗겼다. 손바닥만한 상자 안에는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작은 모래, 작은 조약돌들, 조개, 그리고 붉은 유리같은 것과 작은 쪽지가 돌돌 말려 있었다. 유리병의 마개를 따고 쪽지만 꺼내 펼쳤다.


생일 축하해, 바쿠고 카츠키.


그 한 마디만이 적혀 있었다.








너는 깊이 잠들어 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산소호흡기만을 단 채로. 오는 사람도 없는 차가운 병실에서 홀로 쓸쓸하게. 가정부는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해 주었다. 도련님께서는 가족분들과 그리 친하지 않으십니다. 도련님은 집에 잘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 무감각한 응답에 할 말을 잃었다. 상자는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는 순순히 내어 주었다. 미련 없는 행동에 분노가 솟았다. 분노의 방향은 밖이 아닌 안으로 향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병신같은 너 때문에 내가 나한테 화가 나다니.


네 옆에 앉아서 네가 두서 없이 적은 글을 보았다. 편지는 늘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생일 축하해. 내게는 전하지도 못할 선물이었다. 편지는 유리병에 들어가 있기도 했고, 어느 때에는 작은 선물 옆에 붙어 있기도 했으며, 어느 때에는 덜렁하니 카드만 들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상자에서는 반지가 하나 나왔다. 보자마자 욕지기가 나올 만했는데, 이상하게 나쁘진 않았다. 조심스레 손가락에 끼워 보았다. 중지에는 조금 작았고 약지에는 좀 덜 맞아 어색했다. 당연하다. 내 손가락 사이즈 따위 몰랐을 테니까. 반지와 함께 들어 있는 쪽지에는 아무 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내 생일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았다. 너는 이 쪽지에도, 뭘 적을지 고민하거나, 혹은 몇 자 적고 찢어버린 뒤, 단지 생일 축하한단 한 마디만을 남겼을 지도 모른다. 












토도로키가 눈을 뜬 건 그 날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였다. 그 이후로 일반 병실에 오기까지 또 보름이 걸렸다. 토도로키는 멀뚱하니, 히어로의 끝을 받아들였다. 남들의 예상을 깨고 굉장히 덤덤한 표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왔고, 몇몇은 울었다. 미도리야도 잔뜩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토도로키는 괜찮다고, 울 필요 없다고 말했다. 


"괜찮아. ..... 차라리 잘 됐어. 쉬고 싶었으니까."


토도로키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고, 피곤한 듯 끙끙거렸다. 다들 그래도 충격이 컸구나 싶어, 빠르게 잠든 토도로키의 옆을 비워주었다. 바쿠고는 개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자리를 비웠다. 그 녀석의 옆에 있고 싶지 않다. 역겨웠다. 여전히 너는 내게 역겨움만을 더할 뿐이다. 나한테 뭔갈 바라는 표정 같은 거, 짜증 난다고.





 





그랬어야 했는데.









새벽이었다. 어느 누구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바쿠고는 몰래 병실로 들어왔다. 토도로키는 자고 있지 않았다. 창밖의 달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토도로키가 시선을 문으로 돌렸다. 


".... 바쿠고, 군."


뒤에 붙은 '군'이 어색했다. 히어로 네임을 부르기에는 어색하고 이름을 부르기엔 친하지 않다고 생각한, 토도로키로서는 신경쓴 호칭이었다.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침대 바로 옆에 섰다. 토도로키는 한참을 시선을 돌렸다. 병원에선 시선을 돌릴 만한 것을 찾기 어렵다. 학교처럼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책을 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토도로키의 시선이 어렵사리 바쿠고의 얼굴로 향했다. 여전히, 얼굴을 보는 것은 낯선 사이였다. 오히려 다른 매체를 통해 보는 것이 더 익숙한, 얼굴.


"아직도, 그 시선은 못 버렸냐."

"....."


토도로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등신이냐."

"...... 노력했어. 나름."

"더럽게 했겠지. 이 내가 눈치도 못 챘는데."

"다행이다."


웃는다. 빌어먹게 곱게 웃는다. 달빛이 비친 얼굴은 창백했다. 왼쪽 얼굴의 흉터가 섬뜩했다.


"미안했어. 이제는, 같은 일도 못 하니까, 진짜로, 네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을거야."

"그딴 걸 바랬냐."

"응."

"왜"

"네가 그걸 바랐으니까."


네 웃음에 가슴이 시리다. 젠장. 내 인생 어느 즈음에 이런 절절한 사랑을 받아볼 수 있겠느냐고. 바쿠고는 갑자기 먹먹해졌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온몸이 물 속에 빠져서, 숨쉬기 힘든 느낌. 한참이 지나서야 바쿠고는 다음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등신."

"......."

"왜 그러고 사냐."

"......."

"니가 그래봤자, 난 아무것도 못 줘."

"응, 괜찮아. 바쿠고 군, 정말 괜찮아."


네 웃음이 너무 가냘퍼서 눈물이 났다. 토도로키는 계속, 웃었다. 그래, 그 때도 그랬다. 나 좀 보자고 불러냈는데, 외딴 곳에서 본 네 얼굴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더랜다. 그래서 일부러, 잔인한 단어만 골라 내뱉었다. 네가 웃지 못하도록. 그 때 뭐라고 했지. 


너, 한 번만 더 나 그딴 눈깔로 쳐다보면 죽여버린다.


"그럼 너도 나 봐도 돼."

"...... 그래도 돼?"
"그래."

"그건 내 소원이었는데. 이거 꿈인가?"


네 하찮은 소망에 눈물이 났다. 기껏해야 내 얼굴 쳐다보는 정도다. 닳는 것도 아니다. 그걸 허락받기 위해, 너는 네 내장을 갖다 바쳤다.


한 번만 더 그딴 눈깔로 날 쳐다보면, 그땐 영영 날 못 보게 만들어줄 테니까.


"봐도 괜찮아."

"이젠 안 역겨워?"

"괜찮다고 하잖아."

"힘들면 안 해도 돼."

"아 거 참 시끄럽네. 안 힘들다고."




진심으로, 괜찮았다.

정말로.

난 네가 싫지 않았다.

너무 빌어먹게 늦게 안 사실인데, 난 네가 싫지 않았다.








그걸 좀 더 빨리 이야기해줬으면, 너를 잃지 않아도 됐을까. 


웃는 네 얼굴은 한없이 환하기만 해서,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